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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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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서원배치도 -배치도 위 건물번호를 클릭하시면 상세설명을 보실 수 있습니다.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도산서원은 건축물 구성면으로 볼 때 크게 도산서당과 이를 아우르는 도산서원으로 구분된다.
도산서당은 퇴계 선생이 생전에 강학(講學)하던 곳이며, 도산서원이라 함은 선생 사후 후학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고자 지은 서원과 사당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이다.

서원의 배치 형태는 교육시설인 강당이 앞에 있고 제사 시설인 사당이 뒤에 있는 전형적인 전학후묘(前學後廟)로서, 후대의 많은 서원들이 이를 본받았다.특히 조선성리학의 본산이자 영남 유학의 구심점으로서 그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 주었던 도산서원은 한국 서원의 종주로서 인정받고 있다.

서원의 건축물들은 전체적으로 간결, 검소하게 꾸며졌으며 퇴계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하고 있다.

동재 - 박약재(博約齋)

박약재

박약재는 도산 서원의 원생이 기숙하던 곳으로, 동쪽 편에 위치한 까닭에 동재(東齋)로도 불린다. 강당과 함께 교육 공간의 중심을 이루는데 앞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서재(西齋)와 마주하고 있다. 동재에 거처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배가 된다.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건물로 정갈한 기단부와 기둥의 간결한 건축 구조는 서원의 품격을 잘 드러낸다.
* 박약(博約) - 학문을 넓게 배워 예로 행하라 (博學於文 約之以禮)

진도문 (進道門)

진도문

도산서당의 위쪽으로 서원을 건립하면서 도산 서당과 농운 정사의 사이에 진입로가 만들어졌다. 진도문은 이 진입 공간을 따라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아래쪽의 서당 영역과 서원 영역을 구분하고 있다. 외부와 경계를 짓는 문으로 편액을 걸어 상징적인 예교(禮敎)의 의미를 갖게 하였다.

동광명실 (東光明室)

동광명실

광명실은 서책을 보관하고 열람할 수 있는 오늘날의 도서관(藏書庫)인데 현판은 퇴계선생 친필이다. 진도문을 가운데 두고 동·서 두 곳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습해(濕害)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樓閣式)으로 지었다. 1819년(순조19)에 세워진 동광명실에는 역대 왕의 내사서적(內賜書籍)과 퇴계 선생이 친히 보시던 수택본(手澤本)을 보관하였다. 원래는 동광명실만 있었으며 서광명실은 근대 들어 증건(增建)하였다.
* 광명(光明)은 ‘만권서적(萬卷書籍) 혜아광명(惠我光明)', 즉 '수많은 책이 나에게 광명을 준다' 의미

옥진각 (玉振閣)

옥진각

도산서원은 1969년부터 정부의 고적보존정책에 따라 성역화 대상으로 지정되어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다. 이 사업의 일환으로 건립된 옥진각은 퇴계선생의 유물전시관으로 1970년에 완공되었다. ‘옥진’은 ‘集大成 金聲玉振’을 줄인 말로 ‘집대성했다는 것은 금소리에 옥소리를 떨친 것이다.’라는 의미이다.옥진각에는 퇴계 선생이 생전에 쓰던 베개와 자리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 매화 벼루, 옥서진, 서궤 등의 문방구에서는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던 선생의 손길이 느껴진다. 이외에도 청려장(靑藜杖), 매화등, 투호(投壺) 등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도 전시되어 있다.

하고직사 (下庫直舍)

하고직사

도산서당과 기숙사, 서재, 부속시설을 관리하고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노비들이 거처했다. 지금의 건물은 1932년 옮겨지은 것으로, 원래는 6칸의 'ㄷ' 자 건물이었는데 이건(移建)하면서 동서 날개부가 1칸씩 증축되었다. 처음에는 서당과 같은 공간에 있었으나 서원 건립으로 진입로가 놓인 까닭에 농운정사와 함께 서당에서 분리된 모습이 되었다.

전사청 (典祀廳)

전사청

전사청은 사당에서 제사 지낼 때 쓰이는 음식인 제수를 차리고 보관하는 곳으로, 음식의 재료를 날라오는 고직사와 사당 사이에 위치한다. 2칸으로 된 각각의 건물이 동.서로 나누어져 있는데, 동쪽을 주청으로 하고 서쪽에는 제기고를 마련해 두었다.주청(酒廳)은 온돌방 1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되었다. 온돌방은 제수(祭需)를 준비하는 유사가 하룻밤 지내는 공간이며, 마루는 제상을 마련하여 보관하는 장소이다.제기고(祭器庫)는 전사청의 서쪽 건물로 말뜻 그대로 제기(祭器)를 보관하는 곳이다. 문이 달린 마루칸과 전돌이 깔려 있는 봉당은 제수(祭需)와 제기를 옮기기 편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상덕사 (尙德祠)

상덕사

도산서원의 묘우(廟宇)로서 퇴계선생과 그의 제자인 월천의 위패를 모셔 놓은 사당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보물 제 211호이다. 일반적으로 사당 건물은 간결하고 근엄한 맞배지붕으로 구성하는데 도산서원의 사당은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전면 반칸은 퇴칸으로 개방하고 퇴칸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으며, 나머지 1칸 반은 전면에만 문을 달았다. 전면을 제외한 삼면은 벽으로 처리하고 내부는 하나의 통칸(通間)으로 하였다.월천은 선생 곁에서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고 선생께서 돌아가신 이후에는 스승을 대신하여 서원에서 제자들을 훈육하였으며 특히 청렴 강직함이 돋보인 수재(秀才)이다. 주향위(主享位)는 정면 중앙에서 남향으로 '退陶 李先生'을 모시고 종향위(從享位)는 동쪽벽에서 서향으로 '月川 趙公'을 모시고 있다.

도산서당 (道山書堂)

도산서당

도산서당은 선생이 몸소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57년에 착공하여 1561년에 완공하였다. 서원 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퇴계가 직접 기본 설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서당은 一자 형태의 단정한 3칸 건물로 부엌, 온돌방, 마루로 되어 있다. 여기에 부엌 반 칸, 마루 1칸을 더 달아 내었고, 건물 3면에 퇴를 놓아낸 점이 특이하다. 덧지붕을 달고 마루를 연장하였으며, 방은 완락재(玩樂齋),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이름 붙였다.사색과 연구를 계속하며 제자를 교육하던 단칸방을 '완락재(玩樂齋)'라 하였으니 뜻은 '완상하여 즐기니 족히 여기서 평생토록 지내도 싫지 않겠다.'이고, 제자를 가르치며 휴식을 취하던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고 하는데, '학문에 대한 자신을 오래도록 가지지 못해서 바위에 깃들어 조그마한 효험을 바란다.'라는 겸손의 뜻을 담고 있다.
* 玩樂: 樂而玩之 固足以終吾身而不厭 巖栖: 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

열정(冽井)

열정

석정감열(石井甘冽), 네모지게 조성된 석조 우물이다. 『역경』의 ‘정괘(井卦)’, ‘정열한천식(井冽寒泉食)’의 우물의 의미를 취하여 '열정'이라 하였다. 도산서당 시절부터 식수로 사용하였으며 물이 맑고 맛이 좋다. 선비들의 세심장(洗心場)과도 같다.‘우물은 마을이 떠나가도 옮겨가지 못하고, 길어도 줄지 않으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즐겨 길어 마시는 것과 같이, 사람들은 주인 없는 무궁한 지식의 샘물을 두레박으로 길어 마시듯 자신의 노력으로 인격과 지식을 쌓아, 누구나 즐겨 마실 수 있는 샘물과 같이 사회에 꼭 필요한 인물이 되라‘는 교훈을 주고 있다.
* 冽井 : 石井甘冽(돌로 된 샘물의 물은 달고 맑다)

전교당 (典敎堂)

전교당

서원의 강학 건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원장실과 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부를 높여 위엄을 살렸고 양쪽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성리학자들이 기피하는 짝수 칸의 구성이 특이하며, 서쪽 1칸만 온돌방이어서 비대칭을 이루고 있다. 온돌방은 원장의 거실로 명칭은 한존재(閑存齋)이다. 대청 전면 3칸은 문짝을 달지 않고 개방하였으나, 측면과 뒷면에는 각 칸마다 2짝의 여닫이 창호를 달았다.현재 모습은 1574년 처음 지은 것을 1969년 보수한 것이다. 전교당 정면의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1575년 선조로부터 사액(賜額)받은 것이다. 강당 벽면에는 원규(院規), 백록동규(白鹿洞規), 정조의 사제문(賜祭文), 국기안(國忌案), 사물잠(四勿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보물 제 210호로 지정되었다.

서광명실 (西光明室)

서광명실

1930년(庚午年)에 동광명실을 본 따 지었으며 이 역시 2층 구조의 누각 건물로 서원의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문도를 비롯한 국내 유학자의 문집 등 근래에 발간된 각종 책들이 있다. 이곳에는 일본 유학자인 손시교쿠수이[村士玉水]가 편찬한 '퇴계서초(退溪書抄)'가 있어 퇴계학이 일본 유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동광명실과 함께 모두 1,271종 4,917권이 보관되어 있었으며, 전국 서원 가운데에서 장서로는 고서와 진본이 유명하다. 보관된 각 종 문적은 현재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관리되고 있다.

농운정사 (隴雲精舍)

농운정사

농운정사는 제자들의 기숙사로, 서당의 서쪽에 위치한다. 퇴계선생이 직접 기본 설계를 하고 당시 용수사(龍壽寺) 승려였던 법련(法蓮)과 정일(淨一)을 임명하여 건립하였다고 한다.공(工)자형의 대칭적 건물로 2개의 공간으로 나뉘는데, 각각 2칸의 온돌방과 앞으로 돌출한 마루 1칸,뒤쪽에 봉당 1칸으로 이루어져 있다. 건물 앞 기단 월대(月臺)에는 전돌을 깔았다. 이 기숙사는 2개 반을 수용했는데, 이 같은 연립식의 기숙사는 소수서원(紹修書院)에도 남아 있다.

장판각 (藏板閣)

장판각

전교당 동편에 위치한 서원의 출판소로 목판(冊版)을 보관하는 곳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벽체 사방을 모두 나무 판벽으로 만들고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아 습기 방지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바닥도 지면에서 띄우고 전면 위쪽으로는 살창을 내어 통풍이 잘 되도록 하였다. 퇴계의 문집, 유묵, 언행록, 도산십이곡, 선조어필, 병서(屛書) 등 2,790여장의 판각(板刻)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체계적인 분류와 안전한 관리를 위해 광명실 서책과 함께 2003년 4월에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이관되었다.

상고직사 (上庫直舍)

상고직사

서당 영역에서의 고직사와 구분하기 위해 서원의 고직사를 상고직사라고 한다. 상고직사는 서원의 관리와 식사 준비를 위해 지어진 건물로 노비들이 거처하던 곳인데 일반 살림집의 형태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남북으로 긴 'ㅁ' 자형을 이루며 온돌방 7칸에 창고, 부엌 등을 합쳐 총 21칸으로 되어 있다. 전사청과 연결되어 있는 동쪽 통로와 하고직사로 연결되는 남쪽 통로 옆에 각각 부엌을 배치하여 생활에 편리함을 더하였다.

역락서재 (亦樂書齋)

역락서재

도산서당과 같은 시기에 건립된 건물이다. 서원의 아래쪽에 위치하며, 담장이 둘러져 독립 된 공간으로 되어 있다. 서당의 제자들을 위한 기숙사로, 퇴계의 제자 정사성(鄭士誠)을 비롯한 뜻있는 제자들이 힘을 합쳐 세웠다. 온돌방의 서쪽 반 칸을 비워 아궁이를 설치한 점이 특이하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단정한 건물로 현판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 亦樂 :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서재 - 홍의재 (弘毅齋)

홍의재

홍의재(弘毅齋)는 동재인 박약재와 마찬가지로 원생의 기숙소이다. 강당에서 바라볼 때 오른쪽에 위치하며, 서쪽에 자리하고 있어 서재(西齋)라고도 한다. 동재에 기숙하는 원생이 서재의 원생보다 선배이지만 두 건물은 규모나 장식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지는 않는다. 동재와 서재 모두 3칸 집으로 전면의 반 칸을 내어 쪽마루를 달았다.* 홍의(弘毅) - 선비는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그 책임은 무겁고 도학의 길은 멀기 때문이다(士不可以不 弘毅 任重而道遠)

삼문 (三門)

삼문

상덕사로 들어가는 사당문으로 내삼문(內三門)이라고도 불린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삼문 형식으로 상덕사와 같은 시기에 지어졌다. 계단 때문에 문 안쪽과 높낮이의 차이가 생겨 전면 기둥을 1단 낮은 자리에 세웠다. 이러한 이유로 기단 아래까지 기둥이 내려오는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역태극 문양에 단청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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