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人

퇴계학파

  • 안동人
  • 퇴계학파
조선의 대학자, 퇴계이황
  • 한글명 : 퇴계 이황
  • 한자명 : 李滉
  • 호 : 퇴계(退溪)
  • 시호 : 문순공(文純公)
  • 출생지 : 예안
  • 본관 :진성
  • 나이 : 69
  • 생년 : 1501
  • 몰년 : 1570
연보
년도 내용
1501년 11월 25일 예안현 온계리에서 진사 이식과 박씨부인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502년 생후 일곱달 만에 부친 별세.
1506년(6세) 이웃 노인에게서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등을 배우다. *천자문 - 한문(漢文)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 겸 습자교본.
*동몽선습 - 조선시대 서당(書堂)에서 교재로 사용한 책.
조선 중종 때 학자 박세무(朴世茂)가 저술하여 현종 11년(1670)에 간행하였다.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의 학동들이 배우는 초급교재로, 먼저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오륜(五倫)을 설명하였다. 이어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대사실(歷代史實)과 한국의 단군에서부터 조선시대까지의 역사를 약술하였다.

*명심보감-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 추적(秋適)이 금언(金言), 명구(名句)를 모아 놓은 책.1권 1책. 필사본. 고려대학교 도서관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규장각도서. 원래 19편으로 되어 있다. 후에 어떤 학자가 증보(增補), 팔반가(八反歌), 효행(孝行), 염.의(廉義), 권학(勸學) 등 5편을 더하였다. 각 편은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의 금언을 제시하면서 시작된다. 제1편은 계선편(繼善篇)이다. ‘착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을 주고, 악한 일을 한 사람에게는 하늘이 재앙을 내린다’는 공자의 말로부터 시작된다. 이어 천명(天命), 순명(順命), 효행, 정기(正己), 안분(安分), 존심(存心), 계성(戒性), 근학(勤學), 훈자(訓子), 성심(省心), 입교(立敎), 치정(治政), 치가(治家), 안의(安義), 준례(遵禮), 언어(言語), 교우(交友), 부행편(婦行篇)이 있다. 이 책은 하늘의 밝은 섭리를 설명하고, 자신을 반성하여 인간 본연의 양심을 보존함으로써 숭고한 인격을 닦을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해 주고 있다.

*소학- 중국 송(宋)나라 때의 수양서.주자(朱子: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의 서적을 편집하게 하여 주자가 교열, 가필한 것이다.
1185년에 착수하여 2년 뒤 완성하였다. 내·외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의 4개 항목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윤리사상의 요강을 논하였으며,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의 2개 항목 밑에 한(漢)나라 이후 송나라까지의 현철(賢哲)의 언행을 기록하여 내편과 대조시켰다. 봉건제 사회에서의 개인 도덕의 수양서로 특출한 것이다.
1512년(12세) 숙부인 송재공 이우에게 논어를 배우다.
1515년(15세) 게를 보고 부석천사자유가(負石穿沙自由家) 등의 시를 짓다.
1516년(16세) 봉정사에서 독서하다.
1518년(18세) 로초요요요수애(露草夭夭繞水涯) 라는 시를 짓다. 이 무렵부터 많은 시작을 남기기 시작하였다.
1519년(19세) 독애림만권서(獨愛林萬卷書) 등의 대시인을 방불케하는 철학적인 시를 짓다.
1520년(20세) 침식을 잊고 주역에 빠져 건강을 많이 해치다.
1521년(21세) 진사 허찬(許瓚)의 딸과 혼인.
1523년(23세) 6월에 장자 준(寯) 출생. 상경하여 태학 (성균관)에 유학.
1527년(27세) 둘째아들 채(寀)가 태어나다. 경상도 향시 진시 생원 합격, 11월에 부인 허씨와 사별.
1528년(28세) 진사회시에 2등 합격.
1530년(30세) 안동 권씨와 재혼.
1531년(31세) 셋째아들 적(寂)이 태어났다.
1532년(32세) 문과 초시 2등 합격.
1534년(34세) 문과에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 검열이 되고, 춘추관 기사관, 경연시독관 등의 요직을 겸임하다. 34세에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까지 순탄한 관료 생활을 하다.
1535년(35세) 호송관이 되어 왜노를 동래까지 호송하다.
1536년(36세) 선무랑과 성균관 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다.
1537년(37세)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으로 임명되었다, 모친 박씨의 상을 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다.
1539년(38세) 홍문관 부수찬, 수찬지제교, 경연검토관에 임명되었다.
1540년(40세)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다.
1541년(41세) 홍문관 수찬, 세자지강원문학을 겸임, 홍문관전적, 형조정랑에 임명되다.
1542년(42세) 홍문관부교리, 충청도 강원도 어사로 순찰.
1543년(43세) 신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하다. 그 후 종친부 전섬, 조봉대부, 세자시강원 필선, 조산대부, 사간원 사간, 성균관 사성 등에 차례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귀향하다. 11월 다시 예빈사 부정으로 제수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44년(44세) 10월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하여 명나라 예부관원을 크게 감탄케 하다.
1546년(46세) 5월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돌아오다. 7월에 권씨부인 사망하다.
1547년(47세) 7월 안동부사로 제수되었으나 사했다. 다시 홍문관 응교로 제수되어 마지못해 상경하여 사퇴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548년(48세) 외직을 자청하여 단양군수로 취임(9개월). 둘째아들 채가 죽다. 10월 풍기군수로 전임(1년 2개월). 단양팔경 선정.
1549년(49세) 관내 백운동에 있는 서원의 기틀을 세우고자 상감께 상소하여 편액과 서적을 청했던 바 모두 윤허되었다. 소수서원이라 개칭하여 사액서원의 효시가 되게 하였다. 9월에 신병으로 사퇴하고 귀향하였다. 신병을 이유로 감사에게 세 차례나 사직원을 제출한 다음 회답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오니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1550년(50세)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여 제자를 가르치다.
1551년(51세) 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홍문관교리,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승문원교리, 통정대부,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하다.
1553년(53세) 4월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고 정지운의 천명도를 개정하는 등 학문에 전념하다.
1554년(54세) 형조참의, 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쓰다. 중수경복궁기를 지어 올렸다.
1555년(55세) 병으로 모든 관직 사임하고 귀향하다. 5월에 다시 왕의 부름을 받고 상경하여 사은하고 향리로 내려오다.
1556년(56세) 홍문관 부제학,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도산에서 주자서절요를 편찬 완성하다. 12월 향약을 기초하다.
1557년(57세) 도산서당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를 저술하다.
1558년(58세)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원하다. 허락되지 않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559년(59세)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을 저술하다.
1560년(60세) 고봉 기대승과 편지를 통해 사단칠정론 변론을 시작하다. 도산서당 완성.
1561년(61세) 도산기 저술.
1564년(64세) 2월에 무이구곡도의 발을 쓰다. 4월에 제자들과 청량산행. 정암 조선생의 행장을 짓다.
1565년(65세) 경현록, 역학계몽, 명당실어 등을 저술.
1566년(66세) 특명으로 동지중추부사로 임명되다. 공조판서,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지성균관사동지, 경연춘추관사 겸임. 심경후론 저술. 10월에 회재선생행장을 짓다.
1567년(67세)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 사의를 계속 표명하다가 8월 귀향하다. 역동서원을 새로 건축하다.
1568년(68세)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하여 양관 대제학을 겸임하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 성학십도를 저술.
1569년(69세) 이조판서 임명되자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
1570년(70세) 7월 역동서원에 가서 심경을 강의하고 8월 역동서원이 낙성되어 참석하다. 기명언에게 심성정도를 논하고 11월 격물치지설을 개정하다가 신병이 심상치 않음을 예지하고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중인 장자를 사직, 귀가케하여 장사준비를 갖추게 하였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라는 명문과 자명을 몸소 쓰다. 임종 직전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분부를 하고, 선조 3년 12월 8일 한서암에서 조용히 세상을 떠나다.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1571년 3월에 예안 건지산 남쪽에 장사 지내다.
1573년 봄에 사림의 공론으로 도산 남쪽에 서원이 세워지고 현판이 하사되었다.
1574년 2월에 위패를 도산서원에 봉안하고, 여강서원에서도 위패를 받들어 모시고 제사를 지내다. 12월 문순이라는 시호가 내려지다.
1596년 묘소에 지석(죽은 사람의 이름, 나고 죽은 날, 행적 등을 적어서 무덤 앞에 묻는 돌)을 묻다.
1600년 5월 문집이 이루어지다.

현재 페이지의 정보 및 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