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1. 성장기
가족관계
퇴계 이황은 1501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식(李埴)은 처음 김씨부인에게 장가를 들어 3남 1녀를 낳았다. 그러나 1남과 김씨부인이 29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이후 이식은 박씨를 부인으로 새로 맞이하였고 4형제를 낳았다. 퇴계 이황은 막내로 태어났으며, 태어난지 7개월 만에 아버지 이식은 4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 이식은 많은 책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학문을 좋아하여 죽기 전에 유언으로 “ 나의 자식들 중에 나의 업을 계승하는 이가 있으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라고 말하였다. 이때 나의 업은 그가 가진 책을 통해 학문의 업적을 쌓는 것을 말하였다고 한다.
퇴계의 어머니 박씨부인은 퇴계를 비롯한 형제들을 매우 엄하게가르쳤다고 퇴계가 쓴 글에 나온다.
생활은 매우 빈곤하였지만 아버지 없이 자란 아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하여 바르게 아이들을 인도한 것이다. 관련된 자료를 보면 퇴계의 어머니 박씨부인은 매우 총명하고 바르며 덕이 높은 여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문탐구
어릴때 퇴계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숙부 송안군(松安君) 이우(李?)였다. 이우는 모습이 아주 단아하고 행동에 절제가 있었다. 훗날 퇴계의 문학적 취미와 시적 소양은 이우의 가르침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퇴계는 여섯 살때부터 이웃에 있는 할아버지에게 천자문[한문(漢文)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 겸 습자교본.]을 배우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공부를 하는 것은 지식을 배우는 것 못지않게 몸가짐이 중요하다. 이런 까닭에 아침이면 반드시 세수를 하고 옷가짐을 단정히 하였으며, 글을 배우러 가기 전에 어제 배운 글을 반드시 복습하고 이웃 할아버지에게 갔다고 한다.
열 두살때에 삼촌 이우에게 논어를 배웠으며 글을 배움에 성의를 다하였다. 삼촌 이우는 퇴계에게 능히 돌아가신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을 수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학문초기에 퇴계는 문장력에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문학 등에 관한 역대의 작품을 많이 읽고 도연명과 같은 중국의 시인을 매우 좋아했다.
18세때 연곡(燕谷)이라는 산골짜기 연못에 물이 맑을 것을 보고 읊은 시가 있는데 아래와 같다.
로초요요요수애(露草夭夭繞水涯) 이슬 띤 풀잎은 싱싱하게 물가에 우거지고
소당청활정무사(小塘靑活淨無沙) 고요한 연못을 맑고 깨끗하여 띠끌한점 없구나
운비조과원상관(雲飛鳥過元相管) 떠가는 저 구름, 날아가는 새는 본시 서로 통하지만
지파시시연축파(只?時時?蹴波) 때때로 물찬 제비 발길에 고요한 물결 무너질까 염려되네
뒷날 퇴계는 이 시를 졸작이라고 평가했지만 자연을 완상한 시적 취향이 드러난다 하겠다.
20세가 되면 그의 학문은 상당히 깊은 철학적 사색에 빠져 들어간다. 주역을 읽고 그 뜻을 파악하기에 밤잠을 설치고 식사를 거르는 일이 많았다. 이로 인하여 몸이 쇠약해지고 병에 걸리게 되었다. 이때 얻은 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항상 건강을 신경 쓰게 되었다고 한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혼인을 하고, 24세에 아들 준(寯)을 낳았다.
27세에 경상도 향시에 합격하였다.
27세에 둘째아들 채(菜)가 태어났으나 부인 허씨가 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30세에 권질의 딸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32세에 문과별시에 합격하고, 33세에 경상도 향거에 천거되고, 34세에 대과에 합격하면서 벼슬길에 나아갔다. 당시 과거제도는 소과에 2번의 시험을 통과하여야 하며 다시 대과에 3번의 시험을 통과하여야 했다. 퇴계의 경우 이 다섯 번의 시험을 27세부터 34세에 이르기까지 통과한 것이다.
1. 장년기(출사기)
벼슬길
34세에 벼슬길에 오른 퇴계는 49세까지 관직생활을 한다. 이때 그가 지낸 벼슬의 종류와 품계 등급, 그리고 재직 기간 등을 조사해 보면 표와 같다.
퇴계는 단양, 풍기군수를 제외하면 14개의 29종의 벼슬을 하였다. 그 중에서 재직기간이 가장 긴 것은 홍문관과 승문원에서의 생활이었다. 홍문관은 왕의 대내외 발표문서, 경적을 관리하며 왕의 보좌하는 임무를 가진다. 승문원은 명나라와 일본의 외교문서를 관리하는 곳이다. 외교문서라 조금의 실수가 있어도 외교상의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대문장가나 당대 유학자들이 근무하는 곳이다.
퇴계이황의 벼슬
번호 |
내역 |
횟수 |
1 |
풍기군수 사임 |
3회 |
2 |
사헌부집의사면 |
1회 |
3 |
첨지중추부사사면 |
3회 |
4 |
홍문관부제학사면 |
1회 |
5 |
공조참판사면 |
4회 |
6 |
무오사직소 |
1회 |
7 |
소명사면 |
2회 |
8 |
도지중추부사소명사면 |
4회 |
9 |
예조판서사은후사면 |
2회 |
10 |
예조판서병고걸면 |
2회 |
11 |
동지경연소명사면 |
2회 |
12 |
소명지수 |
2회 |
13 |
우찬성사면 |
1회 |
14 |
걸숭품개정 |
3회 |
15 |
판중추부사사은사후면 |
3회 |
16 |
무진사직소 |
2회 |
17 |
홍문관제학사은후사면 |
1회 |
18 |
판중추부사겸대제학병고걸면 |
3회 |
19 |
대제학사은후사면 |
6회 |
20 |
이조판서병고걸면 |
3회 |
21 |
교서관활인서양사제조사면 |
1회 |
22 |
걸치사 |
3회 |
총 53회 (장 36회, 계 14회, 소 3회 ) |
은퇴와 은거
퇴계는 48세때 자청하여 풍기군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이미 관직을 버리고 도산 온혜로 은거할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풍기군수로 1년을 재직한 후 49세때 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러나 답장이 없어 이후 3번이나 더 사직서를 제출한다. 그래도 답장이 없자 그는 답장을 기다리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사유로 퇴계는 2계급을 강등당하지만 퇴계는 개의치 않고 도산면 토계로 내려와 시냇가에 한서암(寒栖庵)이란 서재를 짓고 책읽기에 파묻힌다.
퇴계가 은퇴한 이후에도 왕은 계속하여 퇴계에게 벼슬을 내린다. 퇴계는 계속 관직을 사양한다. 한번은 명종이 돌아가시고 선조가 즉위한 뒤 선조의 부름을 받고 서울에 올랐다가 8개월간 벼슬살이를 하지만 왕에게 수차 간청하여 간신히 다시 도산면 토계로 내려온다. 이렇게 관직이 주어지고 마지못해 벼슬살이를 한 것이 49세 때부터 70세 까지 간헐적으로 5년정도 세월이다. 그에게는 끊임없이 벼슬이 내려졌으며 사양하고, 다시 내려지는 실랑이가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퇴계는 어떤 경우에도 높은 품계의 벼슬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홍문관 대제학과 같은 학문적 소양이 필요한 부분이나, 문장력이 요구되는 벼슬만 받아들였던 것9세 이후 그가 왕에게 제출한 사퇴원을 보면 이러한 정황이 잘 드러난다.
퇴계의 사퇴서는 비교적 짧게 의사를 밝힌 장, 계가 50회, 비교적 긴 내용의 사퇴의사를 밝힌 글인 소가 3회이다. 사퇴의 내용을 보면 재능의 부족, 신명, 노쇠, 불감당, 염치 존중 등으로 볼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떤 사람에게서나 사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퇴계는 만년에 주자학 연구에 몰두하였기 때문에 벼슬에서 얻어지는 기쁨보다는 학문적 성취에서 얻어지는 기쁨이 컸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의리(義理)를 중시하고 사회적인 역할에 대한 나아감과 물러남에 때를 중시한 옛 선현들의 가르침 또한 퇴계의 끊임없는 사퇴에 한 몫 하였다. 이에 부가하여 당시 정치적 형세를 보면 정치적으로 매우 갈등이 심화되던 시기였기에 이러한 정치 갈등에 회의를 품고 그 가운데에 있기 싫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죽음을 맞이하여
퇴계가 죽음을 맞이하는 자세는 매우 자연스럽다. 그의 나이 70세를 맞이하여 일기 형식을 통해 그의 일상을 보면 병마와 죽음에 임하여 동요와 불안한 기색이 없다.
70세의 나이에 12월 큰집 제사에 참여한 후 병색이 짙어졌다. 12월 3일에 자식들과 제자들에게 명하여 남에게서 빌려온 책들을 모두 반환하라고 당부한다. 봉화 현감으로 있던 아들 준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돌아오라고 명하고 4일에 조카 이영(李寗)을 불러 유서를 쓰게 하였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만나고 석별인사를 하였다. 5일에 관을 짜라고 명하였고, 7일에 제자 이덕홍(李德弘)에게 명하여 서적을 관리하게 하였다. 병세가 위독하여 문인들이 주역의 점괘를 보니 군자유종(君子有終)이란 점사를 얻었다. 그리고 8일 아침에 시종을 시켜 매화에 물을 주도록 하였다. 저녁 5시에 자리를 정돈하도록 명하고 부축하여 일으켜 앉으니 조용하게 세상을 버렸다.
그의 자명(自銘)은
나면서 어리석고 자라서는 병도 많네
중간에 어찌하다 학문을 즐겼는데, 만년에 어이하여 벼슬을 받았던고
학문은 구할수록 더욱 더 멀어지고, 벼슬을 마다해도 더욱 더 주어지네
나아가면 넘어지고 물러 굳이 감추니
나라은혜 부끄럽고 성현말씀 드렵도다
높고 높은 산이 있고, 흐르고 흐르는 물이 있어
평복을 갈아입고 뭇 비방 떨쳐 버렸네
내 생각 제 모르니 내 즐김 뉘 즐길까
옛 사람 생각하니 내 마음 쏠리도다
뒷 사람 오늘 일을 어찌 알아주지 못할건가
근심 속에 낙이 있고, 낙 가운데 근심있네
조화를 타고 돌아가노라, 또 바랄것이 무엇이랴
53세 천명도설후서(天命道說後敍)
중국의 사상적 흐름인 태극도설을 중심으로 전개한 퇴계 사상의 요체 중 하나이다. 성리학적 맥락과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으며 원래 이 책은 다른 사람이 일정하게 정리한 것을 퇴계가 다시 작성하여 완성한 것이다. 이후 성학 10도의 근간이 되는 책이다.
54세 연평문답발(延平問答跋)
여려수신론숙흥야매잠주해서 (與廬守愼論夙興夜寐箴註解書)
연평은 주자의 스승 이동의 호로서 제자와의 문답 세편을 수록한 책이다. 퇴계는 성리학자 중 주자를 높게 평가하여 그의 스승인 연평 역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퇴계는 연평의 책을 간행하면서 이에 대한 해설서 혹은 소개글이라고 할 수 있는 발문을 쓴 것이다.
55세 청량산유람제시(淸凉山遊覽諸詩)
청량산은 퇴계의 산보길 최종점에 있는 산이다. 낙동강 변에 자리하고 있어 수려한 자연과 아름답고 단아한 모습의 산이다. 그래서 소금강산이라 불리는 이 산에 대하여 퇴계의 애정이 각별하였다. 산봉우리 이름도 지어주었으며 도산서당도 처음 이곳에 터를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청량산을 유람하면서 쓴 시를 모아 둔 책이다.
퇴계는 거의 일기를 쓰다시피 시작을 즐겼다고 한다. 그래서 퇴계의 시는 4000여 편에 육박할 정도로 많다. 이중에서는 한문으로 된 것도 있으며 도산 12곡과 같이 한글로 된 시도 있다. 한시로서 주목되는 시들은 낙동강변을 산보하면서 쓴 시들과, 주변 문인들과 교유하면서 쓴 시들이다. 도산 12곡은 한글로 된 시인데, 한문으로 쓴 시들이 노래로 부를 수 없다고 하면서 함께 노래할 수 있도록 한글로 된 시를 만든다고 한 점은 의미 있는 대목이다.
56세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주자의 여러 가지 학설을 짧은 글로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원래 퇴계는 이 책을 간행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제자들이 주자의 학문 요체를 잘 정리하여 놓아 애독하면서 간행되게 되었다고 한다. 주자의 학설을 간략하게 이해시킨 명저이다.
57세 계몽전의(啓蒙傳疑)
주자의 역학계몽(易學啓蒙)이라는 책에 대하여 어려운 부분을 해득하여 정리한 책이다. 주자의 주역본의(主役本意)에 입각하여 주로 해석한 책이다.
58세 자성록서(自省錄序)
퇴계가 은퇴 이후 주변 사람들과 서신을 교환한 것을 정리하여 엮은 것이다. 많은 편지 가운데 학술적으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엮은 것이어서 학문적 깊이가 있는 책이다. 퇴계를 알고자하는 후학들에게 도움이 된다.
59세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60세 기대승과 사단칠정에 대한 논변 시작
기대승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발(理發), 기발(氣發)에 대하여 59세부터 66세까지 5, 6회 동안 장문의 편지를 통해 논쟁을 벌였다. 이 논쟁은 한국유학사에서 처음으로 전개된 학술논쟁이었으며 논쟁의 결과 한국 성리학을 꽃피게 한다.
61세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記)
64세 청량산유산람제시(淸凉山遊山覽諸詩)
심무체용변(心無體用辨)
퇴계는 성리학의 정통을 정주학(程朱學)으로 삼고 이 나머지 이설들에 대한 비판을 가한다. 이 책은 서화담의 무도 이구의 심무체용설을 반박한 글이다.
조정암행장(趙靜庵行狀)
정암 조광조와 회재 이언적의 일생을 정리하는 글인 행장 2편이다. 평소 퇴계는 행장을 잘 쓰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조광조와 이언적은 퇴계가 존경하는 인물이었기에 기꺼이 행장을 기록하였다.
66세 회재선생행장(晦齋先生行狀)
심경후론(心經後論)
양명전습록변(陽明傳習錄辨)
68세 육조소(六條疎)
선조에게 보낸 글이다. 군왕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바와 실천해야 할 것을 적은 글이다. 결국, 성리학은 보다 나은 세상을 구현하는 도를 실천하는 학문이기에 퇴계의 세상을 보는 정신이 담겨있다 하겠다.
70세 사서석의(四書釋義)
실내비품
왕골로 짠 자리가 3개 전해온다. 그 중 하나에는 (이첨지댁 퇴계)라는 자필글씨가 있다. 왕골로 짠 방석 1개와 빗자루, 등잔을 얹어놓는 등잔거리도 1개 전해온다.
문방구
문방사우로는 매화연(梅花硯)이라는 이름의 벼루가 있다. 매화와 대나무가 조각되어 있어 고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며 퇴계 문인 김북애가 선물한 것이다. 매화연에 딸린 것으로 글씨를 쓸 때 양쪽을 눌러 고정해주는 옥서진(玉書鎭)이 있다.
흑단연(黑端硯)이라는 벼루도 전해온다. 한편, 벼루를 넣는 흑색 나무 갑도 전해오고 있다.
책을 읽기 위하여 사용한 검은 색 목조 책상인 서기(書?)가 있다.
청려장(靑藜杖)
명아주로 만든 지팡이다. 이름을 청려장(靑藜杖)이라 한다.
매화등(梅花?)
밑면이 28.5cm 높이 47.5cm 의 중국식 도자기로 중간 부분에 매화문양이 새겨져 있다. 용도는 분명하지 않다.
투호(投壺)
정신통일을 위한 기구로 활용되어 일명 정심투호(正心投壺)로 불린다. 화살을 통안에 넣는 놀이기구이다.
혼천의
퇴계 문인 간재 이덕홍이 제작한 것으로 천체의 운행을 나타낸 본이다
퇴계 글씨
퇴계의 글씨는 안동 인근에서 많이 전해온다. 단아하고 삶의 정성이 담겨있어 서예가로서 퇴계의 활동도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고 평가된다. 현재 퇴계의 글씨로 남아있는 것은 도산 12곡 목판본 한글과, 탁청정, 후조당, 겸암정사 등이다.
관련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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