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과 회시(會試)에 불합격하다.
퇴계 선생이 글씨첩[퇴계선생필법유첩, 보물 제548호로 지정]을 주다.
1558년(27세)
소과 회시에 다시 불합격하다.
1561년(30세)
소과 회시에 2등으로 합격하다.
1564년(33세)
어머니가 돌아가시다.
1565년(34세)
시묘살이를 위해 종모암(終慕庵)을 짓다.
1566년(35세)
연어헌(鳶魚軒)을 짓다.
1567년(36세)
부인이 죽다.
1568년(37세)
문화유씨(文化柳氏)와 재혼하다.
1569년(38세)
배우려 오는 학생들을 위하여 경광서당(鏡光書堂)을 짓다.
관물당(觀物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을 짓다.
1570년(39세)
퇴계 선생이 돌아가시다.
1571년(40세)
한송단(寒松壇)을 쌓다.
죽천대(竹泉臺)를 쌓다.
1573년(42세)
청성정사(靑城精舍)를 짓다.
점풍대(點風臺)를 쌓다.
1574년(43세)
금귀대(金龜臺)를 쌓다.
1578년(47세)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1581년(50세)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다.
1585년(54세)
수석대를 쌓다. 청성산의 반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에게 나누어주다.
1587년(56세)
7월 24일에 관물당에서 돌아가시다.
1587년
10월 마감산에 장사 지내다.
1608년
청성산 아래 유정재(幽貞齋) 서쪽에 서원을 창건하다.
1612년
위판을 봉안하고 향례(享禮)를 행하다.
1667년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가 행장(行狀)을 짓다.
1680년
문집이 이루어지다.
1768년
서원을 금화동(金華洞)으로 이건하다.
1771년
묘갈(墓碣)을 세우다.
1809년
문집 속집(續集)이 이루어지다.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서원이 없어지다.
1909년
다시 서원을 세우다.
1916년
위판을 봉안하고 향례를 행하다.
1956년
문집 별집(別集)과 연보(年譜)를 간행하다.
생애
1532(중종 27)~1587(선조 20).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장중(章仲), 호는 송암(松巖). 안주교수(安州敎授) 륙(?)의 아들이다.
1549년(명종 4) 아버지를 여의고 1561년 29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1564년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벼슬을 단념하고 청성산(靑城山) 아래에 무민재(無悶齋)를 짓고 그곳에 은거하였다.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유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과 교분이 두터웠고 이들로부터 학행을 높이 평가받았으며, 만년에 덕망이 높아져 찾아오는 문인들이 많았다.
집경전참봉(集慶殿參奉)·내시교관(內侍敎官) 등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56세로 일생을 마쳤으며, 묘소는 청성서원(靑城書院) 뒤편 언덕에 있다. 안동의 청성서원(靑城書院)에 제향 되었다.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공부한 제자 중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하며 학문에 전념했던 세 사람을 가리켜 흔히 ‘계문삼처사(溪門三處士)’라 하는데, 송암 권호문, 후조당 김부필, 매암 이숙량이다. 송암은 솔밤(송야) 출신인 권호문은 퇴계의 ‘난진이퇴(難進易退,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벼슬에서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김)’의 출처관을 제대로 실천하였던 인물이다.
16세기 조선은 성리학이 본 궤도에 오른 시기이다. 도학(道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이라도 일컬어지는 성리학의 발전에 퇴계의 영향은 지대하였다. 따라서 퇴계의 문하에서 공부하던 제자들에게 있어 성리학적 이념의 추구가 우선이었지, 글이나 시를 짓는 일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송암은 퇴계의 300여 명의 제자들 중 시를 짓는데 공력을 가장 많이 쏟았다고 할 만한 인물로, 현재 문집에 실려있는 시는 1700여 수에 가깝다.
그는 평생을 자연에 묻혀 살았는데, ‘유학자(儒學者)로서의 기상이 있다’, ‘맑고 깨끗한 산림(山林)의 풍모가 있다’, ‘백세의 스승이 될 만하다’, ‘강호고사(江湖高士)’라는 등의 말은 모두는 송암의 일생을 평가하는 말이다. 맑고 깨끗한 일생을 살았듯이, 그를 모신 청성서원의 사당 이름도 ‘청풍사(淸風祠)’라 하였다. 청풍이라 이름한 것은 처사(處士)로서 끝까지 출사(出仕)하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을 연마하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맑고 깨끗한 삶’을 바꾸지 않았던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작품으로는 경기체가의 변형형식인 '독락팔곡(獨樂八曲)'과 연시조인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이 '송암집'에 전한다. 14권, 한시 1700여 수를 남겼다.
독락팔곡(獨樂八曲)
권호문이 지은 경기체가로, 현존하는 경기체가 중 가장 마지막 작품으로 주목된다. 제목에는 8곡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7곡만 수록되어 있다. 권호문은 서문에서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노래라 하는 것은 흔히 시름[憂思]에서 나오는 것’이라 하였듯이 이 노래 또한 나의 불평에서 나온 것이니, 한편 주자(朱子)의 말처럼 노래함으로써 뜻을 펴고 성정(性情)을 기르겠다.”라고 하였다. 작품의 전편에는 강호자연 속에 파묻혀 한가로이 지내는 즐거움을 노래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홀로 즐기는데서 오는 소외감과 의기(義氣)를 마음껏 펴보지 못하는 불평지기(不平之氣)이 깔려 있다.
한거십팔곡(閑居十八曲)
권호문이 지은 연시조로 모두 18수이다.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처사(處士)로 속세를 떠나 자연을 벗삼아 풍류를 즐기며 살아가는 심회를 읊고 있다. 이 노래는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후기 모습을 보여주는 한 사례로 문학사적 의미가 있다.
퇴계선생필법부유첩(退溪先生筆法附遺帖)
보물 제548호(1972. 8. 30)로 지정되었다. 모두 3권으로 퇴도선생필법(退陶先生筆法)은 퇴계 이황 선생이 그의 제자인 송암 권호문 공에게 글씨 체본으로 써 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소 등 크고 작은 글씨체와 해(楷)·행(行)·초(草)서의 각체를 따로 써 주었다. 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遺帖)은 2책으로 장첩(粧帖)되어 있는데, 퇴계 선생의 편지를 모은 것이다. 종택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관물당(觀物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호(1985. 8. 5)이다. 송암 권호문이 건립하여 학문을 강론하던 건물로, 뒤에 건립된 송암종택 내에 있다. 이 건물은 평면(平面)은 ‘一’자형 인데 비해 지방의 이음매는 ‘丁’자형으로 되어 있고, 지붕 좌측은 남북으로 뱃집이다. 우측은 팔작지붕이다.
한서재 (寒棲齋)
1551년(20세)에 지은 건물. 권호문의 종택인 관물당 앞에 있다.
청성서원(靑城書院)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3호(1985. 8. 5)이다. 송암 권호문 선생을 추모하는 서원으로 건립되어 매년 춘추(春秋)로 향사[서원에서 공자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를 지내고 있다. 서원 내에는 강당, 동재, 서재, 정도문(正道門), 청풍사(淸風祠), 전사청, 신문(神門) 등 모두 7동의 건물이 있다. 선조 41년(1608)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鳶魚軒址)에 창건하여 광해군 4년(1612)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다가 영조 43년(1767) 현 위치로 옮겼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9년 복설하여 매년 2월과 8월 하정일(下丁日)에 향사하고 있다.
묘소
청성서원 뒤편 언덕에 있다. 현재의 묘소는 원래 있던 자리가 아니라 이장한 것이다. 묘비에는 권호문의 유언에 따라 ‘靑城山人權好文之墓’라고 적혀 있다.
연어헌(鳶魚軒)
권호문이 1566년(35세)에 자연과 벗하며 유유자적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청성산(靑城山) 아래 낙동강을 굽어보고 서 있는데, 위쪽에는 동문수학 하며 도의(道義)로 깊이 사귀었던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정자인 석문정사(石門精舍)가 자리 잡고 있다. 두 사람은 청성산을 나누어 가지며 평생 자연과 벗삼으며 학문에 전념할 것을 기약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8년 주손 영갑(寧甲)의 발의로 중수되었고, 이어서 주손 오상(五相)에 의해 수선이 이루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연어헌 현판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의 글씨라고 전해진다. (풍산읍 막곡리에 있다. 청성서원에서 강을 따라 조금만 가면 우측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