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영남의 거 유- 이상정
이상정(1711년~1781)은 18세기 영남지역을 대표하는 대 성리학자이다. 그의 자(字)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이며,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711년(숙종37년) 안동 일직의 소호리에서 퇴계학맥을 계승한 갈암 이현일(李玄逸)의 외증손, 밀암 이재(李栽)의 외손자로 태어났다. 이상정은 한산인으로 가정 이곡을 시조로 하는 목은 이색의 15세손이다. 목은 11세손 수은 이홍조는 벼슬이 별제로 광해주 때 폐모론이 제기되자 외조인 류성룡의 고향으로 남하하여 안동시 일직면 소호마을에 정착하게 되었다.
1725년 14세 되던 해, 이상정은 외할아버지 밀암 이재의 문하에 수학하며 소학[중국 송(宋)나라 때의 수양서. 주자(朱子: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소년들을 학습시켜 교화시킬 수 있는 내용의 서적을 편집하게 하여 주자가 교열, 가필한 것이다. 1185년에 착수하여 2년 뒤 완성하였다. 내·외의 2편으로 되어 있는데, 내편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의 4개 항목을 기본으로 하여 유교의 윤리사상의 요강을 논하였으며, 외편은 가언(嘉言)·선행(善行)의 2개 항목 밑에 한(漢)나라 이후 송나라까지의 현철(賢哲)의 언행을 기록하여 내편과 대조시켰다. 봉건제 사회에서의 개인 도덕의 수양서로 특출한 것이다]. 맹자를 읽었다. 이 때「태극도」의 기화형화에 대해 논의하여 밀암의 칭찬을 받았다고 전한다. 그는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27세에 연원찰방으로 부임하였다. 31세에는 휘릉별검, 32세에 승문원정자, 36세에 성균관전적을 거쳐 예조좌랑, 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43세에 연일현감이 되었으마 11개월 만에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 후 52세에 사헌부감찰, 60세 강령현감, 66세에 사헌부지평, 67세로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70세에 병조좌랑, 병조참의, 예조참의, 71세에 형조참의가 되나 6월에 사직상소를 올렸다. 이때 구조소에서 임금의 덕을 논하면서, ①입지 ②명리 ③거경 ④체천 ⑤납간 ⑥ 홍학 ⑦용인 ⑧애민 ⑨상검 등을 논하고 결론에서 “구조는 모두 수덕 양심 하는 요령이며 정치하고 행정하는 근본입니다.”고 하였다.
이상정은 관직생활 못지않게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였다. 29세에 「과거사의」와 「만수록」, 30세「솔성지위도설」을 지었으며, 31세에 『제양록(制養錄)』과 『퇴도서절요』를 편집하고 「심동정도」를 저술하였다. 또한 34세에 이르러 「일성사덕설」과「리기동정선후」의 두 설을 저술하고 『리기휘편』을 이루니, 리기총론과 이합선후, 동이편전, 동정선악, 승부, 체용, 유무, 허실, 분합, 미현과 잡론 등 24조로 편집하였다. 35세에는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을 완성했으며, 39세에 『사례상변통고』를 지었다. 48세에『병명발휘』를 편집하고 49세에 『주자서절요』를 편수했다. 52세에 『계문제자록』, 60세에 『심경강록간보』, 65세에『연평답문속록』과 『주자전서』를 편집하였다.
그는 다양한 관료생활과 더불어 방대한 저술활동은 그의 대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1781년 12월 9일에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현재 그와 관련한 유적으로는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대산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고산서원(지방기념물 제56호, 안동시 남후면)과 일직면 망호리에 소재한 대산종가가 있다. 관련 문집으로『대산문집(大山文集)』과『대산실기(大山實紀)』가 있으며, 저술로는 1750년(영조 26) 주희(朱熹)의 〈경재잠〉에 대한 여러 설을 모아 편장을 나누고 해설한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일상생활의 범절과 행동수범, 성인, 현인의 어록과 행적을 수록한『제양록(制養錄)』, 이덕홍(李德弘)의 ≪심경강록(心經講錄)≫에서 누락된 부분과 해석하기 어려운 자구를 뽑아 주석을 붙인『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등이 있다.
대산문집 [大山文集]
대산 이상정 선생은 평생을 학문연마와 저술(著述) 후학 양성에 바쳤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퇴계서절요, 경재잠집설, 이기휘편, 제양록, 약중편, 병명발휘, 결송장보 등을 저술 하였다. 문집 27책 외에 속집 5권, 실기 10권, 문인록 3권 등이 전해오고 있다. 이러한 선생의 저술은 뒤에 문집(文集)으로 발간이 된다. 대표적인 것이 「대산문집」이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이상정(李象靖)의 시문집. 69권. 목판본. 이 문집은 1802년(순조 2) 조카 우(箔)의 주선으로 이루어진 원집 52권, 속집 4권, 외증손 유치명(柳致明)이 정리한 ≪대산선생실기 大山先生實記≫ 10권과 역시 유치명이 완성한 ≪고산급문록 高山及門錄≫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집명 |
편저자 |
권수 |
연도 |
현존여부 |
원집 |
조카 우(箔) |
上 |
1-16 |
18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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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 |
17-5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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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집 |
조카 우(箔) |
4권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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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선생실기 大山先生實記 |
외증손 유치명 |
10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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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급문록 高山及門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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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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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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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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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6세손 성구(性求) 등이 구본에 근거해 중간
문집명 |
권 |
내용 |
비고 |
원
집 |
1-3 |
시 460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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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소 6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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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8 |
서(書:편지) 75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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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2 |
잡저(雜著)33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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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4 |
서(序文) 32편 기(記)1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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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
발(跋文)45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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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
잠(箴)1편, 명3편, 찬(贊)1편, 상량문3편, 애사3편,축문21편, 제문2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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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
비문6편, 묘지명1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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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
묘갈명19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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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52 |
행장3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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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집 |
1 |
사(辭) 1편, 시15수, 소1편,서(書:편지)5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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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잡저2편, 서(序)5편, 기5편,발4편, 상량문4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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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애사3편, 고유문17편,제문6편,묘지명5편, 묘갈명5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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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행장1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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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산선생 실기 |
1 |
세계보 연보 각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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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행장 묘지명 묘갈명 신도비명 각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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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서술(敍述), 관규록 각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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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유사1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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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급문록 |
1-3 |
제자 273인의 인적사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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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56에 언행록 2편, 권78에 경전강의 2편, 권9에 일기 1편, 만사제문, 권10에 고산지(高山誌) 1편,≪고산급문록≫은 권1~3에 제자 273인의 인적사항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경치와 계절에 부쳐 한가롭고 고요한 정서를 묘사한 것이 대부분이며, 시사를 다룬 것은 거의 없다. 그 중에서 〈남유록 南遊錄〉은 연일현감으로 있을 때 접왜사(接倭使)로서 경주동래 등지를 유람하며 지은 것이고, 〈구절 九絶〉〈칠곡 七曲〉은 대산서당의 주위 경관을 읊은 것이다. 그밖에 자신의 감회를 읊은 것과 선현의 운을 따서 지은 것, 만시 등이 있다.
소의 〈삼사형조참의소 三辭刑曹參議疏〉는 형조참의를 사직하면서 올린 만언소(萬言疏)로, 입지(立志)명리(明理)거경(居敬)체천(體天)납간(納諫)흥학(興學)용인(用人)애민(愛民)상검(尙儉) 등 9조목의 군덕을 권면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750편에 달하는 서간은 문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학문적인 내용이 대부분으로 선배나 동배들과 의견을 교환한 것과 제자들의 질문에 답변한 것이다.
그 가운데 권상일(權相一)과 이기(理氣)의 선후를 논변한 〈답권청대서 答權淸臺書〉, 권만(權萬)과 경학(經學)과 성리학의 관계를 논한 〈답권강좌서 答權江左書〉, 태극도(太極圖)에 관한 논변을 담은 〈답이천유서 答李天蓬書〉, 인(仁)에 대해 논한 〈답김퇴보서 答金退甫書〉, 왕도와 패도에 관해 논한 〈여김광천서 與金光天書〉 등이 그의 사상적 터전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잡저는 저자의 사상을 이루는 골간으로, 특히 〈솔성지위도설 率性之謂道說〉〈일성구사덕설 一性具四德說〉〈이기동정설 理氣動靜說〉〈이기선후설 理氣先後說〉〈심무출입설 心無出入說〉〈사단칠정설 四端七情說〉 등에는 성리학의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는 이황(李滉)의 학문을 계승, 존리적(尊理的)인 견지에서 인성론(人性論)을 해명하는 데 치중하고 있다.
잡저 가운데 〈독성학집요 讀聖學輯要〉는 주자서와 퇴계서를 탐독하면서 학문을 연구하고 수신과 제가에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항목을 골라서 적은 것이고, 〈과거사의 科擧私議〉는 과거제도 시행 상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방안을 제시한 것이며, 〈재사학규 齋舍學規〉는 서당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규정을 만든 것이다.
〈고산지〉는 그가 죽은 뒤 향사
향사 : 서원에서 공자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
문제 등에 관한 기록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고산급문록≫은 그의 제자들을 수록한 것으로 이춘부(李春溥)유도원(柳道源)이종수(李宗洙) 등 173명의 명단이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대산실기 [大山實紀]
활자본. 11권 5책. 외증손 유치명(柳致明)이 편집하고 1845년(헌종 11)에 간행, 이어 이상정의 6세손 성구(性求)가 증보하여 1925년에 중간하였다.
대산실기
내용 |
편저자 |
권수 |
연도 |
비고 |
세계(世系) 연보 |
유치명 |
1 |
184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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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기(行狀) 묘지(墓誌) 묘갈(墓碣) 신도비명(神道碑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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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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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술(敍述) 관규록(管窺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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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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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遺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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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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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문(記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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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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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일기(考終日記) 만사(輓詞:만장) 제문(祭文) 진정(陳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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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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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지(高山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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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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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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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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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조선 후기의 학자 이상정(李象靖)이 1750년(영조 26) 주희(朱熹)의 〈경재잠〉에 대한 여러 설을 모아 편장을 나누고 해설한 책. 1책. 원래 〈경재잠〉은 주희가 그의 벗인 장식(張氓)의 〈주일잠 主一箴〉을 보고 만들어 그의 서재 벽에 붙여 두었던 것인데, 뒤에 왕백(王柏)이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 도식화했고, 이황(李滉)은 그의 〈성학십도(聖學十圖)〉에 다시 그것을 포함시켰다.
전체가 160자에 불과한데, 저자는 그것을 10장으로 나누고, 그것과 관련된 제유의 학설을 한 칸씩 내려 대자(大字)로 쓰고, 그 아래에 소자쌍행(小字雙行)으로 다시 해석하면서 간간이 소주(小註) 내에 본인의 의견을 안자(按字) 아래 부기하였다.
그는 이 책 전체를 때의 동정과 마음 및 행동의 표리를 통괄한 경 공부(敬工夫)로 파악하고, 학자가 이것을 절실하게 연구하고 진실하게 체험하면,그것이 바로 경의 참다운 실현이라 하였다.
이 책은 조선시대 성리학에서, 특히 인간의 주체적 각성을 중요시하는 심학(心學)의 요체라고 할 수 있는 경에 대한 집중적인 해석서라는 데 그 학문적인 의의가 크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경재잠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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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전체 160자) |
현존장소 |
1 |
정(靜)할 때의 경 공부에 대하여 |
규장각 |
2 |
동(動)할 때는 물론, 동과 정을 겸한 경 공부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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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외표(外表)의 엄숙 단정함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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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다시 통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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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마음의 주체성과 효능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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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마음이 근본이 되어 일을 일관되게 처리할 수 있음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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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
다시 앞의 여섯 장을 총괄, 동정과 표리를 일관한 바른 모습을 가지는 것이 요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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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
마음에 주체가 서 있지 않았을 때의 병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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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외적인 일에 있어서 한결같지 못할 때에 생기는 병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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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
이상의 전권을 총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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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양록(制養錄)
'명문사족 가문이 시행하였던 자녀교육의 한 전범(典範)'
상편은 24조로 구성되어, 일상생활의 범절과 행동수범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하편은 20조로 구성되었고, 유가도통(儒家道統)의 성인현인의 어록과 행적을 수록하였다. 책의 편차는 인용 문헌을 각 항목에 따라 적절하게 기재한 뒤, 저자 스스로의 평설과 예화를 안(按:조사하여 증거를 세움)의 형식으로 설명하였다.
제양록
구분 |
내 용 |
보관장소 |
상편 24조 |
통언(通言)심술(心術)두(頭)안색(顔色)의복음식 등 일상사의 행위규범을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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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장각 |
하편
20조 |
요(堯)순(舜)우(禹)탕(湯)문왕무왕 등 유학도통 인물의 행적과 어록을 수록하고 있다. 배움의 과정에 있는 젊은이들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하고, 행동준칙을 알려주고자 한 것이 하편의 목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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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서문에서, "밖으로 드러나는 일상사의 행위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방일한 마음을 수습하는 주요한 수단이기 때문"임을 밝히고 있다.
인용된 목록은 ≪표기 表記≫≪논어≫≪곡례 曲禮≫≪주자경재잠 朱子敬齋箴≫ 등 60여 종에 이르러 저자의 넓은 독서 범위를 알려 준다. 저자 자신이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연구하였기에, 이 책의 내용도 심성론적(心性論的)인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선비가 제양공부(制養工夫)를 잠시도 멈추지 않을 때, 마침내 마음과 몸이 표리일치가 되고, 우주와 인간이 합일되어 통일조화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유학도통의 마지막 인물로서 우리 나라 이황을 유일하게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정통 유학의 정맥이 중국에서는 이미 끊어졌으며, 이것이 동방의 이황에 의하여 정당히 계승, 발전되었다는 자긍심을 은연중에 밝혀 놓은 것으로 이해된다. 이 책이 지닌 교육사적 의의는 명문사족 가문이 시행하였던 자녀교육의 한 전범(典範)을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또한 본격적인 성리학 탐구는 가까운 일상생활의 예의범절을 몸소 행하고 난 뒤에 순차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명료하게 제시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
조선 후기의 학자 이상정(李象靖)이 이덕홍(李德弘)의 ≪심경강록 心經講錄≫에서 누락된 부분과 해석하기 어려운 자구를 뽑아 주석을 붙인 책. 4편 1책. 목활자본.
1795년(정조 19) 김종경(金宗敬)김종덕(金宗德) 등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이만운(李萬運)의 서문과 김종덕의 발문이 있다. 범례서(序)찬(贊)심학도(心學圖) 등을 비롯하여, 제1편에는 인심도심장(人心道心章) 등을, 제2편에는 성의장(誠意章) 등을, 제3편에는 우산지목장(牛山之木章) 등을, 제4편에는 계명이기장(鷄鳴而起章) 등을 본경(本經)의 순서에 따라 수록하였다.
이 책은 ≪심경강록≫을 근거로 하여 필요없는 부분은 삭제하고 부족한 부분은 보충한 것이기 때문에 이덕홍과 이함형(李咸亨)이 문답한 내용에는 두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으며, 뜻이 미진한 곳이나 누락된 곳이 있으면 원집을 대조하여 보충하였다.
자기의 의사를 표시함에 있어서는 안(按)자를 쓰고 해석을 첨가하였다. 또한, 제가의 설을 인용하여 설명한 곳이 많다.
규장각도서와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한산이씨 대산종가
한산이씨 대산종가는 망호리 마을 안쪽에 있으며, 나지막한 마을의 지붕 속에 큰 기와집의 형태가 큰 도로에서도 볼 수 있어 마을의 운치를 돋우고 있다. 이 종가는 대산 이상정 선생이 이 집 사랑채에서 태어났을 때는 큰집이 있었으나, 일제 때 집을 3년 정도 비워두었기 때문에 너무 퇴락하여 더 이상 유지가 곤란하였다. 그 후 대산의 8대손인 이용원이 17세 때 결혼하고 3~4년 뒤에 전보다 규모를 조금 늘여 새로 건립하였다고 한다.
이 종가는 넒은 마당을 앞에 두고 뒤쪽에 안채를 배치하였으며, 안채 우측에 방형의 담을 둘러 사당공간을 따로 마련하여 종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실의 구성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안방을 들이고, 그 앞에 부엌을 두었다. 대청 우측에는 3칸에 3개의 방이 연이어져 있는데 위쪽의 방을 ‘태실’이라 부르며 중사랑방으로 사용하였고 나머지 2칸은 제례시에 사용하는 방(빈소)이라 한다. 안채의 전면 중앙에는 중문간을 두어 출입을 하게 하였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바닥은 시멘트로 마감하였다. 내부에는 5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내삼문은 정면 3칸측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사당과 마찬가지로 맞배지붕이다.
고산서원
고산서원은 이상정 선생 사후에 정자가 있던 집터 위에 세웠다.
지방기념물 제56호로 지정된 고산서원은 1768년(영조 44) 대산 이상정 선생이 고산정사를 창건하여 학문과 후진 양성을 한 터전에 선생이 돌아가신 후 1789년(정조 13)에 사림의 공의로 대산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이 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향사
향사 : 서원에서 공자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례를 말한다. 만 지내왔다. 1977년 고산정사와 백승각을 보수하고, 1984년과 1985년에 강당인 호인당, 묘우인 경행사, 동재를 중수하였다. 1985년 유림의 공의로소산 이광정 선생을 배향하였다.
관련문헌
1. 정순목, 「조선시대의 교육명저순례」, 『배영사신서』 128, 1985.
2. 현상윤, 『대산선생문집』, 현음사, 1982.
3. 유명종, 『한국철학사』,일신사, 1984
4. 이병도, 『조선유학사초고』,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국사연구실.
5. 류인회, 「대산 이상정 철학의 현대적 의의 - 지와 인이 교제하는 사이가 곧 천변 만화의 지도리다」, 『동방학지』11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1.
6. 손흥철, 「대산 이상정의 사단칠정론」, 『동방학지』11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1.
7. 김우형, 「대산 이상정의 이기론」, 『동방학지』11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1.
8. 류명종, 「조선후기 (18 세기) 성리학사에서 대산 이상정의 사상적 위치 - 혼윤설과 분개설의 통일」, 『동방학지』113,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2001.
관련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