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민왕은 1351년 왕위에 오른 고려의 31대 왕이다. 13세기 후반 무신정권의 시대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고려는 중국 원나라의 간섭 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려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를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어
일정기간 그 곳 황제를 호위하며 머무르게 하였다. 공민왕도 1341년 강릉대군으로 봉해진 이후 원나라의 요청으로 10년간 숙위하며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혼인하였다.
즉위교서에 드러난 정치적 포부
공민왕의 즉위교서에는 고려의 자주적 전통과 역사를 내세우는 입장이 강조되어 있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한 이래 역대의 왕이 고려를 계승해온 사실을 언급했을 뿐만 아니라
기자(箕子)의 존재도 거론하고 있다. 또한 왕의 측근이 정치를 문란시켰던 점을 바로 잡으며 왕 자신이 정치의 주체로 친히 나서겠다는 포부를 밝히는 한편, 불법적인 전민탈점(田民奪占)의 시정, 인신매매 금지
등의 구체적인 현안에 대한 시책도 밝혔다.
친원세력을 축출하다
즉위와 동시에 시도한 공민왕의 개혁은 원나라와 고려 내 권문세족의 반발로 인해 끝까지 개진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1356년 원 나라가 불안정한 기운에 휩싸이자 공민왕은 이를 틈타
다시 개혁을 시도하였다. 우선 친원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잔치를 베푼다는 명목 하에 그들을 궁에 불러들여 입궐할 때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살해하였다. 친원세력의 제거로 시작된 공민왕의 반원개혁정책은 이로부터 약
3개월간에 걸쳐 급물살을 타게 된다. 정동행성(征東行省) 이문소(理問所)를 혁파하고, 정치, 사회, 경제, 군사의 여러 면에 걸쳐 그동안 왜곡되고 변질되었던 제도를 시정하는 한편 백여 년에 걸쳐 원나라의
영토로 편입되다시피 하였던 쌍성총관부를 탈환하였다. 공민왕 5년의 이 개혁은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고, 이로 인해 나라는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신돈과 손을 잡다
1361년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나라 질서는 다시 어지러워졌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공민왕은 다시 개혁의 지팡이를 들었다. 이렇게 시작된 제3차 개혁정치는 공민왕 14년
신돈이 등용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신돈을 통하여 곧 최영을 비롯한 주요 무장세력을 제거하고, 측근인물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하고 불법 점거된 토지, 농장에
불법으로 소속된 노비와 부역을 도피한 양민을 찾아내 정리하는 작업을 시행하는 한편 성균관을 중건하고 이색, 정몽주, 정도전 등의 사대부를 통해 성리학도 발전시켰다.
노국공주 곁으로 간 공민왕
이처럼 자신의 즉위기간을 오롯이 개혁에 바친 공민왕은 왕비였던 노국공주가 죽자 슬픔에 빠져 영정 공사를 무리하게 감행하는 등 훗날 원성을 사는 행동을 취하기도 하였다. 결국
개혁을 비난하는 소리가 거세지고 다시 정국이 어지러워진 1374년, 개혁반대파에 의해 살해되어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하였다.
왕건과 병산전투
후삼국 통일에 기여한 안동
안동에 위치한 저수봉에서 고려의 선봉군이 후백제군을 격파하며 시작된 병산전투는, 약 3일 간의 짧은 기간에 8천여 명의 전사자를 낼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당시 이 전투의 과정을
담은 전설이 전해지는데, 다음과 같다.
견훤은 원래 지렁이의 화신이었다고 하는데, 전시(戰時)에는 모래땅에 진을 쳐 신변이 위태롭게 되면 모래 속으로 들어가 웬만해선 그를 물리칠 수 없었다고 한다. 삼태사(三太師)가
현재의 안동군 와룡면 서지동에 진을 치고 있을 때, 견훤은 그 동쪽 낙동강변 모래땅에 진을 쳐 대전하였는데, 싸움이 수십번 계속되어도 끝이 나지 않고 견훤은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모래속으로 들어가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삼태사 군사들은 전략을 세워 흐르는 강을 막아 못을 만들어 물 속에 소금을 수없이 넣어 염수(鹽水)를 만들어 놓고 접전을 했다.
그러나, 어느 때보다 치열한 싸움이었다. 견훤은 싸움이 점점 불리해지자 당황하여 지렁이로 둔갑해서 모래 속으로 기어들었다. 삼태사군(軍)은 이때다 하여 염수의 못물을 터뜨렸다.
소금물이 흘러내리니 아무리 둔갑한 지렁이일지라도 견딜 재주가 없었다.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패주하여 안동 땅에서 물러갔다고 한다. 지금도 이 내를 소금물이 흘러갔다고 하여 간수내(가수내)라 부르고 견훤이
숨은 모래를 진모래(진몰개, 긴모래)라고 한다. 지금은 안동댐 수몰로 모래를 볼 수 없다.
병산전투를 계기로 고려의 개국공신이 된 삼태사의 위패는 현재 태사묘에 모셔져있다. 한편 태사묘 안쪽에는 안묘당이라 불리는 작은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모셔진 위패에는 또 다른
전설이 전해진다. 삼태사가 왕건을 도와 싸울 때 안중구라는 할머니가 고삼주라는 술을 빚어 견훤을 접대하고, 취하도록 하여 왕건과 삼태사의 승리에 공을 세웠다는 내용의 전설이다.
치열했던 병산전투와 두 가지 전설
공민왕은 1351년 왕위에 오른 고려의 31대 왕이다. 13세기 후반 무신정권의 시대가 막을 내림과 동시에 고려는 중국 원나라의 간섭 하에 놓이게 되었고, 고려 왕실에서는 왕위
계승자를 원나라에 볼모로 보내어 일정기간 그 곳 황제를 호위하며 머무르게 하였다. 공민왕도 1341년 강릉대군으로 봉해진 이후 원나라의 요청으로 10년간 숙위하며 위왕의 딸 노국공주와 혼인하였다.
왕실원찰 용수사
안동시 도산면 운곡리에 용수사라는 사찰이 자리잡고 있다.
가람의 대부분이 지은 지 얼마 안되는 새 건물이라 근래에 생긴 사찰로 여기기 쉽지만, 그 유서가 매우 깊다.
「용수사 개창기」에 따르면, 1164년(의종18)에 각화사 주지였던 석윤에게? 안동에 사찰을 짓도록 명하였다고 한다.‘용수사'라고 사액하고, 지방관에게 돕도록 하여 그 다음해에
본당, 요사, 강사, 창고, 부엌에 이르기까지 90여 칸을 완공하였다.
이렇게 완성된 용수사는 의종대로부터 명종대에 걸쳐 왕실의 원찰이었다. 특히 명종은 용문사, 용암사, 소림사 등과 함께 용수사에 내신(內臣)을 두고 그를 통해 재정을
조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유학의 대가인 농암, 퇴계 선생과도 밀접한 연관을 맺었다. 농암과 퇴계선생의 가문은 이곳을 학문탐구의 장으로 이용하였고, 도산서당을 지을 때는 용수사의 법련 스님이
도맡아 일을 추진하였다.
1896년에 불타버렸으나, 이후 다시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여몽연합군과 김방경
다음 시기에 주목되는 것은 안동출신 장군 김방경의 활약이다. 김방경 묘지명에는 그의 활약상이 잘 드러나 있어 그가 뛰어난 무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70년(원종11)?삼별초의 난이 일어난 이듬해 원나라 장군과 함께 여몽연합군을 형성하여 삼별초의 진지인 진도를 함락시켰다. 삼별초의 남은 병력들이 제주로 내려가서 항쟁하자
1273년(원종14) 다시 한 번 그들을 쳐서 평정하였다. 또 충렬왕 연간 원나라의 두 차례 일본 정벌 때에는 고려군 도원수로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김방경은 고려가 몽고의 침략과 지배하에 들어가기 시작한 원종 대부터 충렬왕대에 이르는 시기에 국가의 중책을 맡은 인물이었고, 당시 안동은 그를 중심으로 하여 고려 조정에 상당한
비중을 가진 지역이었다.
충렬왕의 안동방문
지금까지 거론되지 않았던 안동의 역사 가운데 중요한 하나는, 고려의 충렬왕이 안동에 와서 제법 긴 시일 동안 체류했다는 것이다. 충렬왕 연간에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두
차례 출정했는데, 원나라의 요청으로 김방경이 이끄는 고려군도 이에 가담하였다. 두 번째 출정에서 고려군은 1281년(충렬왕7) 5월 경상도 합포에서 일본으로 떠났는데, 충렬왕은 그해 8월 경상도의 민심을
수습하고 전황을 일찍 파악하기 위하여 안동을 방문, 행궁에서 체류하였다. 안동의 인문지리지인 『영가지』에는 충렬왕이 약 30일을 머무르는 동안 안동의 영은정에 행차하여 귀한 제약을 하사하였고, 이곳 현판의
이름을 붙여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한편 안동의 명물로 알려진 소주가 이 즈음 보급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소주는 원래 허준의 『동의보감』에서 몽골족의 술로 규정되어 있는데, 이 술이 충렬왕의 방문과 함께
안동에 전해져 보급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임시수도 안동
공민왕은 홍건적의 난을 피해 1361년 12월에 안동에 와서 머물다가 1362년 2월에 개성으로 출발하였다. 공민왕이 머문 70일 동안 안동은 명실공히 고려의 임시수도였다.
안동이 임시수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시기부터 고려 말까지 지속된 안동지역 사람들의 고려 조정에 대한 우호적이며 충정어린 태도, 그리고 안동이 갖는 지정학적 위치, 안동사람들과 중앙 정계의
관련성, 안동사람들과 왕실의 혼맥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선 안동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여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한 일종의 요새와도 같은 지리적 이점을 갖추고 있다. 조선 광해군 때 조정에서 안동의 보장책을 논의하는
과정에서,"공민왕이 영남이 온전히 성하고 병사와 군량이 넉넉했던 까닭에 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언급이 있었다는 기사가 전해지는데, 안동이 자연지리적 조건과 함께 군량이 넉넉하다는 점이 평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둘째로 고려 조정에 적극 협력한 안동의 역사적 전통이 어려운 시기에 높이 평가되었다는 사실이다. 백문보의 『금방기』에 따르면, 안동사람들이 행궁을 말끔히 정돈하고 임금의 행차를
인도하는데 태연하고 침착하여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공민왕이 처음부터 안동을 선택하여 남향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안동의 우호적 성향과 그를 맞이하는 태도를 높이 평가하며 안동을
임시수도로 정한 것이라 해석된다.
안동이 임시수도로 선택된 세 번째 이유는 바로 ‘인물'이다.
백문보의 『금방기』에서 안동에 장군의 기가 엇갈려 덮혀 있고, 관면과 패옥 차림이 서로 바라다 보였다고 할만큼 고려 조정에는 안동 출신의 인물들이 많았다. 한편 몽진 시 공민왕을 따른 호종신하 가운데에는
안동과 애초에 혼인 또는 관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자들이 여럿이었다. 호종 신하 중 홍언박, 홍언유 등은 공민왕의 외사촌이면서, 각각 안동 권씨와의 혼인관계를 맺거나 안동도호부사를 지내는 등 안동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공민왕이 안동을 임시수도로 선정한 중요 배경으로 이들의 영향 또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고려 말기의 안동
공민왕은 몽진 시 안동이 자신을 환대한 것을 잊지 않고 여러 가지 조취를 취했다. 몽진 당시 복주목이었던 안동을 안동대도호부로 승격시켰으며, 단순히 읍호만 대도호부로 승격하는데
그치지 않고, 세금을 면제해줌으로써 부민들에게 실질적인 혜택을 주었다. 이는 안동부민들에 대한 공민왕의 감동이 얼마나 컸는지를 말해준다.
한편 안동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공민왕의 몽진은 그들에게 새로운 국가관을 심어주고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로 다가왔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안동 사람들은 활발하게 중앙진출을
이룩하게 되는 바, 안동 권씨와 구안동 김씨가 그 대표적 예이다. 두 세력으로 인하여 안동은 중앙무대에서 더 주목받게 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안동부 관풍루의 어느 기문에는 공민왕의 안동몽진 이후
안동 지역에서 수많은 인물들이 내외에 이름을 드날리고, 고위직이 줄줄이 배출되었다고 적혀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권근, 김자수 등의 인물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중앙정계에 안동출신 인물이 포진함으로써, 혼인관계에 따라 외지인의 안동 유입이 활발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훗날 영남 사림파 형성의 기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안동 지역의 주자학 도입기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그 대부분이 공민왕의 안동몽진을 전후한 시기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이는 공민왕의 안동 몽진이 안동지역 주자학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기여했음을 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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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안동에 큰 비가 내려 냇물이 넘쳐서 침몰되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으며......”
-『조선왕조실록』명종 2년(1547) 경상감사 임호신의 수재에 관한 보고문
"1547년에 홍수로 떠내려간 것을 김해에서 주워 다시 달았다. 만력 정미년에 명나라 병사들이 파손하였고, 임인(1602)년에 부사 황극중이 보수하고, 1603년에 부사
홍이상이 금칠을 다시 하였다. 1605년 가을에 영호루가 유실되었는데, 김륵이 노력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영가지』(1608년)?
위의 두 기록에서 그들이 몇 차례씩이나 홍수로 인한 유실, 파손 등으로부터 애타게 보호하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매우 중요하고 귀한 것이었음은 분명하다.『안동부
읍지』(1898)에 따르면 1792년(정조 16)에도 영호루가 유실된 적이 있으며, 1934년 수해 때 누각이 유실되었지만, 이것만은 안동부에 잘 보관하여 왔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공민왕이 썼다고 전해지는 영호루의 현판이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왔던 1362년의 어느 날, 영호루에 들렀다가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개경으로 돌아간 후에 이곳의 현판을 왕 자신이 직접 써서 하사하였다는 것이다. 당대의 명인들과 세인들은 영호루 현판 글씨에 대하여 광채가 번득이고 힘찬 글씨라며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백문보의 『금방기』에 따르면 “임금의 덕의 밝은 빛이 이곳에 강림하여 몇 천 년을 두고 우러러보며 흠모하게 되었으니, 나라 일의 기틀에 불행함이 있었던 것이 도리어 누를
위하여 다행한 일이 되었다.” “이는 모범이 되고 해와 별처럼 밝아서 함께 한 고을의 영광과 광채가 된다.”고 하였으니, 안동 사람들이 공민왕의 방문에 얼마나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봉정사 진여문
가로 25.5cm, 세로 65 cm 크기에 종서로 쓰여진 현판이다.
현판의 좌측에 '여공왕보묵(麗恭王寶墨)' 이라 새겨져 있다. 공민왕 몽진 이후 1363년에 봉정사 극락전이 중수된 사실이 있는데, 이 무렵에 내린것으로 여겨진다. 혹은
공민왕이 몽진 시에 봉정사 순행을 하면서 써준 것일 가능성도 있다. 글자의 획이 다른 현판에 비해 성글기 때문에 여백이 많지만 송설풍의 예쁜 글씨이다.
공민왕의 즉위 기간이었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조맹부가 왕희지체를 복고하여 창안한 개성있는 서체 즉, 송설체가 들어와서 유행하던 시기이다. 송설체는 기본적으로 왕희지체의
전형을 바탕으로 간결, 유려, 우아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공민왕은 고려 말기 서화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는데, 특히 이 송설체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었다고 한다. 공민왕이 남긴 것으로 알려진 현판 글씨
중에서는 이 곳 봉정사 진여문의 것이 가장 송설체에 근접하는데, 이러한 사실이 진여문 현판 글씨가 공민왕의 것이라는 설을 뒷받침해준다.
* 사진출처 : 이효걸 / <천등산 봉정사> / 지식산업사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물로서 현재 남아 있는 목조 건축 중에 가장 아름다고 오래된 건물이다.
영주 부석사 본전인 이 무량수전 현판 글씨가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온다.
현판 뒷면에는 공민왕 친필이라는 묵서가 있다. 전체적으로 안진경체에 가까운 글씨인데, 전형적인 안진경체처럼 힘차지는 않고 유려하여 송설체 기운이 가미되어 있다. 이처럼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여겨지는 현판 글씨들이 서로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당시에는 송설체 이외에도 여러 가지 서체가 있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현판을 개채하면서 글씨에 약간의 변화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에 필체의
차이만으로 공민왕의 친필이
* 사진출처 : 김보현 외 / 빛깔있는 책들
<부석사> / 대원사
안동웅부
가로 207cm, 세로 81.3cm 크기로, 횡서로 쓰여진 현판이다.
현판의 우측 상단에 '여공민왕 보묵(麗恭愍王寶墨)'이라 새겨져 있다. 서체는 송설체인데, 안자는 힘이 있으나 부자는 힘이 약한 편이다. 이것이 공민왕이 내린 글씨로 전해오지만, 그 근거는
사료에서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지거나 전해오는 유물에 대해서는, 그것의 진위여부를 떠나서 안동 사람들이 ‘공민왕’ 과 관련된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현상이 매우
중요하다.
고려 말기 서화에 능했던 공민왕이 안동을 임시수도로 정해서 머물렀다는 인연으로 정사에서부터 전설에 이르기까지 공민왕의 글씨로 알려진 것이 전국에서 안동에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이것은
안동사람들에게 공민왕이 중요한 인물임을 말해준다. 안동 사람들은 공민왕의 몽진을 계기로 안동이 확실히 고려 제 2의 수도와 같은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면서 공민왕의 친필을
더욱더 확실한 증거물로 삼아왔다.
* 사진출처 : 안동대 안동문화연구소 /
<안동역사문화기행> /푸른역사
청량사 유리보전
청량산 청량사 본전인 유리보전 현판 글씨도 공민왕의 친필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러한 전설은 청량산 일대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들을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데 청량사는 고려말 조선초기의 국사 고봉선사가 중건한 것으로 공민왕 친필이라고 보기 어렵다. 게다가 현판의 좌측에는 글씨를 쓴 시기와 필자를 ‘戊申 菊秋 花山客(무신 국추 화산객)’으로
밝히고 있으니, 공민왕 친필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공민왕 친필이라는 말이 전해져오는 것은 청량산 일대의 공민왕 신앙과 관련되어 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전승되는 이야기 중에 “노국공주가 청량사 응진전에서 기도를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에 대한 신앙에 더 가까운 것이라 보이는데, 그 때문에 청량사 응진전에는 청나라식의
보관을 쓰고 있는 형상의 노국공주의 좌상이라는 조상이 2개 모셔져 있다.
이렇게 노국공주의 조상이 모셔지자, 유리보전의 글씨를 공민왕과 연결시키기 더욱 쉬웠을 것이다.
안기역 하사품
공민왕은 몽진을 와서 안동부에 머무를 때 안동의 환대에 감동하여 여러 가지 물품을 하사하였다.
안동부 이외에 안기역의 역리들에게도 놋쇠 술잔과 잔대를 14벌이나 내리고 있다. 잔을 내린다는 것은 곧 술을 권한다는 뜻이다. 술을 권할 정도가 되면, 그만큼 친숙하거나 친해질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로 볼 때, 공민왕이 안기역리에게 술잔과 잔대를 하사했다는 것은 그들의 노고에 대한 진정한 고마움의 표시였다.
손홍량 하사품
공민왕의 안동 몽진 시, 손홍량은 평복 차림으로 공민왕을 맞이하며 충성스런 진언을 하였고, 그로부터 ‘일직한 사람’, 곧 올곧은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공민왕 일행이 개경으로
환도한 후에 그는 왕으로부터 지팡이와 왕이 직접 그린 영정을 하사받는 영예를 얻었다.
공민왕이 손홍량에게 하사한 지팡이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지만, 지팡이 하사에 대한 축시는 다수 남아 있다. 축시는 백문보, 이인복, 정사도, 이달충, 김제민, 이색 등이 쓴
것인데, 이들이 쓴 시는 공통적으로 왕이 지팡이를 하사한 것에 대하여 상당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정사도는 손홍량이 이 지팡이를 하사받은 것이 늙은 몸으로 임금을 문안한데 대한 영광스런 선물이라고 했으며, 이달충은 어려울 때 잡아주고 원할 때 받쳐주는 손홍량의 마음에 대해 공민왕이 고마움을 표시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한편 박팽년은 그의 저서 『진권서』에서 자신과 동년배인 손홍량의 4세손 손조서의 이야기를 토대로 공민왕이 하사한 손홍량의 초상화에 대해 다루고 있다. 내용인 즉, 공민왕이 손수
공의 모습을 그려 내려주시니 그 때 사람들이 영광으로 여기며 서로 가사를 읊었으며, 안동의 향인들이 각을 세워 진영으로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 전해지는 손홍량의 초상화는 이를 모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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