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字)는 천장(天章), 탁부(卓夫)이며, 호는 단암(丹巖),백운(白雲)이다. 세칭 역동선생으로 불리며, 문희공을 시호로 받았다. 1263년 충북 단산현 품달리 신원(충북 단양군 적석면 현곡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단양우씨 6대손 문하시중 우천규이다.
1278년(충렬왕 4),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고, 29세 되던 1290년(충렬왕 1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1291년 영해사록(寧海司錄: 현 경북 영덕의 지방관)을 시작으로 9개 군의 지방관을 역임하면서 민간에 성행하던 음사와 미신을 타파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전국적으로 풍미하던 불교의 폐단을 통탄하며 척불에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1308년 감찰규정(監察糾正)으로 승진하여 내직으로 있을 당시, 충선왕이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이었던 숙창원비를 범하자, 흰옷을 입고 지부상소(持斧上疏,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올리는 상소)를 올린 후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고향인 예안으로 돌아온 그는 학문, 특히 역학(易學)을 깊이 연구하고, 후생들에게 성리학을 가르쳤다. 충숙왕이 그의 충의를 가상하게 여겨 두 번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충혜왕 때 성균관좨주(成均館祭主)에 이르렀다.
역동선생은 문성공 안향의 제자인 육군자 중의 으뜸이었다고 한다. 문성공 안향은 역동의 학문과 행실을 높이 평가하여 비록 제자라도 정중하게 대하였으며, 안향이?위독하게 되었을 때에 백이정, 권보 등에게 말하기를 “나는 심술미와 습지와 관견이 우탁만 못하다. 그대들은 동년배라고 부끄럽게 생각하지 말고 내가 죽은 후에 우탁을 스승으로 섬겨라.”라고 하였으므로?안향이 죽은 후에 그의 제자들 중에 역동의 제자가 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전래된 유학은 삼국시대로부터 고려 시대에 걸쳐 인재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국가를 통치하는 데 에 있어서도 대단한 역할을 하여 왔다. 그러나 이 시기의 유학은 문학적인 유학이라고 하여 사장유학이라고 한다. 그러나?정자, 주자 등에 의하여 새롭게 전개된 유학은 신유학, 또는 정주학이라고도 하는데, 이 정주학은 특징은 이론과 실천을 동시에 중요시하면서도 특히 실천궁행(實踐躬行)에 역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의 유학은 문학이나 지식을 중시하는 유학이었는데 비하여, 고려말기에 전래된 정주학은 지식과 실천을 동시에 추구하면서 실천궁행하는 데에 더욱 역점을 두는 유학이라는 점에서 그 특징이 있다.
퇴계 선생의 언행록에 보면 "융경 원년 정묘 년 가을에 중국의 사신인 허국과 위사량이 우리나라에 와서 묻기를 ‘동방에 공맹의 심학이나 기자의 홍범에 능한 이가 있었습니까?’ 하니 퇴계선생이 기록하여 보이기를 ‘고려 때 우탁과 정몽주가 있었고, 조선조에 김굉필과 정여창과 조광조와 이언적과 서경덕 등이 있었다’ 고 하였다"
여기에서 볼 때 퇴계 선생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뛰어난 유학자로 역동 선생을 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퇴계는 또 역동서원기에서 “고려조의 우좨주 선생께서 만년에 퇴거하여 계시던 곳이?이 땅이었고, 지금도 그 자손들이 살고 있다. 만일 사전에 실려 있는 것을 상고하여 보면 선생의 충절 대의는 이미 천지를 움직이고, 산악도 흔들 수 있을 만하고 경학의 밝음이나 진퇴의 정당함은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난 바가 있었으니 후학의 사범이 되어 백세의 모향을 받아야 할 이가 선생이 아니고 누구이겠는가” --- “대저 역(易)이란 사문의 조주종으로 정씨의 전은 선유들이 발하지 못한 바를 발한 것인데, 선생께서는 그 글이 처음으로 이땅에 왔을 때에 능히 얻은 바가 있어 강학하여 교수했으니, 이는 민멸되어 전하지 못하는 것을 이어서 논술함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역동이란 이름으로 서원을 표시하는 까닭이다.” 라고 하였다.
우탁은 1342년 세상을 떠났다. 그와 관련한 유적으로는 역동서원(易東書院, 안동시 송천동 안동대학 내) , 단암서원(丹巖書院, 충청북도 단양군 적성면 현곡리), 단산서원(丹山書院,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역동유허비(易東遺墟碑,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가 있으며, 묘소는 안동시 예안면 정산리 웃솥우물 북쪽 산에 있다. 그와 관련한 저술로는「탄로가(嘆老歌)」와『역동문집(易東文集)』, 그리고 우탁의 사적을 기록한 『상현록(尙賢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