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은 조선초기의 무신이자 과학자이다. 자(字)는 자현(子見)이며, 호는 백곡(柏谷) 또는 불곡(佛谷)이며, 익양(翼襄)을 시호로 받았다. 이천은 1376년(고려 우왕2년) 무신집안 출신인 예안이씨 군부판서(軍簿判書) 이송(李摩)과 어머니 곡성염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천의 어머니는 고려말의 권문세력가, 염흥방의 누이동생이다. 그러나 염흥방이 최영, 이성계 일파에게 제거되면서 아버지 이송을 포함하여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이천과 그의 동생 이온은 다행히 한 승려의 도움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천은 유년시절부터 무술이 뛰어나 1393년(태조2년) 18세의 나이로 별장(別將)에 임명되었고, 1402년 무과초시에 급제했으며 1410년에는 무과중시(武科重試)에 합격하였다
세종 원년인 1419년 왜구들이 충청도 앞 바다로 침입했을 때 우군첨종제(右軍僉摠制)로 임명되었다가 곧 우군부절제사가 되어 이종무가 이끄는 대마도정벌에 참가했다. 이천은 우군을 거느린 이지실을 보좌했는데 이때의 공으로 좌군 동지총제에 올랐다. 그리고 곧바로 종2품 무관급인 충청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으며 세종 2년(1420)에는 현재 과학기술부의 차관격인 공조참판(工曹參判)으로 임명된다.
이천의 과학적인 재질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그가 충청도 병마절도사로 있을 때였다. 이천은 군선의 물에 잠기는 부분이 빨리 썩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갑조법(甲造法, 판자와 판자를 이중으로 붙이는 방법)의 시행을 주장하고 군함의 선체는 크고 속도가 빨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의 주장에 따라 제조된 군선이 왜구의 토벌에 크게 기여하자 그의 과학적인 재질을 인정한 세종은 야심에 찬 국책프로젝트 중에 하나인 금속활자를 만들도록 전격적으로 공조참판에 임명한 것이다.
이천은 공조참판으로 임직하면서 새로운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드는 일에 힘썼다. 경자자의 주조로 인쇄능률은 많이 좋아졌으나, 좀 더 아름다운 자체(字體)를 만들기 위한 주조사업이 다시 시행되어, 마침내 1434년(세종 16)에 갑인자(甲寅字)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20여만 개의 대소활자로 주조된 이 갑인자는 자체가 훌륭하고 선명할 뿐만 아니라, 큰 활자와 작은 활자를 필요에 따라 섞어서 조판할 수 있는 발전적인 것이었다. 갑인자의 인쇄로 조선의 활판인쇄기술은 일단 완성되었다.
그는 또한 서운관에서 정초(鄭招), 장영실(蔣英實), 김빈(金聆) 등과 수년 동안 노력한 끝에 1437년에 대간의(大簡儀), 소간의,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천평일구(天平日晷), 정남일구(定南日晷), 규표(圭表) 등의 해시계를 만들었고,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고도 불리는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 또한 그는 평안도 도절제사가 되어 평안도와 함경도 변방에 나타나는 야인(野人:만주족)들의 침략을 막고, 그들을 토벌할 때 여진족에게서 얻은 중국의 제철기술을 바탕으로 수철(水鐵:무쇠)을 연철(軟鐵)로 만드는 기술을 익혀 부족한 구리 대신에 쇠로써 대포를 만드는 등 화포의 개량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왜구의 토벌과 북쪽 오랑캐의 정벌, 인쇄술의 향상과 도량형의 표준화, 천문의기 제작 등 무인과 과학자로써 화려한 생을 펼쳤던 이천은 조선의 과학기술을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한 조선초기의 대표적 과학자요 기술자로 볼 수 있다. '기술자 장군'이었던 그를 기념하기 위해 태능의 육군사관학교에는 1977년 이천의 시호를 따라 익양관(翼襄館)을 세웠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잠수함을 이천호로 명명했다.
현재 그와 관련한 유적인 유서각(諭書閣), 추원각(追遠閣)은 충북 보은군 외속리면 오창리에 남아있다. 이천의 후손들이 조선 중종 때 낙향하여 충북 보은 외속리에 정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1434년(세종 16) 주자소(鑄字所)에서 만든 동활자(銅活字)인 갑인자(甲寅字)와 천문관측기구인 간의대(簡儀臺)는 경복궁과 서울에 남아있다. 저술로는 조선 초기 압록강 유역의 여진정벌과 4군(四郡) 경영사실을 기록한 『서정록(西征錄)』이 있으며, 현재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