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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동포 역사와 특징
- 안동포의 역사와 특징
삼베의 역사는 전 세계적으로 매우 길다. 인류가 옷감을 만들 때 가장 처음으로 사용한 재료가 바로 대마이며, 서아시아에서는 기원전 6750년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락바퀴, 즉 삼실을 만드는 도구가 출토되었다. 한반도에서도 신석기시대 유적에서 어망추와 가락바퀴가 발견되어 이미 선사시대에 마포를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안동 지역에서 또한 선사시대 고분군의 방추차, 기와의 포목흔 등이 발견되어 선사시대부터 삼베가 직조되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시대 유리왕이 마을을 둘로 나누어 공주들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고, 한 달 동안 길쌈내기를 할 것을 명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삼국시대부터는 본격적으로 삼베가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안동의 삼베, 안동포가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고려시대 일반 백성들은 쌀, 옷감, 노동력을 국가에 기본세로 제공하였다. 그 중 옷감은 기본적으로 마포였고, 품질이 뛰어난 제품은 특산물로 바쳐졌다. 고려사에는 안동에서 마포를 공물로 바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는 전국 어디에서나 제작하여 바치는 일반적인 마포일 뿐이다. 같은 책의 기록에 따르면, 안동의 특산물은 오히려 마포가 아니라 명주였다.
조선시대에도 삼은 전국적으로 재배되었으며, 안동의 특산물에는 여전히 마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게다가 면화가 급속하게 보급된 이래 마직업은 쇠퇴하였으며, 마포는 면화재배가 불가능한 북부지방에서만 주로 제작되었다.
‘안동포’라는 용어가 사료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일제 강점기이다. 조선 후기 안동에서는 면화를 생산하였으나, 당시 일본이 자신들의 국익을 위해 한국 기후에 맞지 않는 종을 재배하도록 강압하여 면화 재배는 점차 쇠퇴하였다. 일본은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 각 지역별로 명주와 삼베를 장려하였는데, 이 때 안동에 삼베를 장려하였다. 안동포는 당시 삼베를 장려받은 타지역의 마포와 함께 바로 이 때 부터 생산량이 늘어나고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합성섬유의 보급으로 타 지역의 마포는 소멸되었고, 1980년대 마포의 소비량이 늘면서 안동포는 지금의 명성을 전국적으로 얻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서 값싸고 질이 뛰어난 섬유가 대량생산되면서 상대적으로 값이 비싼 안동포에 대한 수요가 줄어듦에 따라 직조기능 보유자의 숫자도 감소하였다. 현재 안동포 직조기능은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베의 질을 평가하는 단위로 새(升)가 있다. 새는 옷감의 곱기를 나타내는 단위로서, 경사 80올이 1새에 해당하는데, 올수가 많으면 그만큼 옷감의 결이 고와진다. 보통의 삼베가 5새에서 7새인 반면, 안동포는 8새~9새, 10새를 짜기도 한다. 따라서 다른 지역의 삼베보다 더욱 고운 결을 가지고 있다.
안동지역 사람들은 이러한 안동포의 우수성과 특성을 이야기할 때, 생냉이 기술을 가장 중요한 비결로 꼽는다. 생냉이로 삼베길쌈을 하기 때문에 올이 가늘고 빳빳하며 고운 삼베를 직조한다는 것이다.
생냉이란 대마껍질을 충분히 물에 불려서 겉껍질을 삼톱이라는 연장으로 훑어 벗긴 다음, 삼을 삼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다. 반면에 익냉이는 겉껍질을 벗기지 않고 미리 삼을 삼은 후에, 물레로 돌려 삼가락을 만들고 이것을 다시 타래로 만든 뒤 잿물과 함께 솥에 넣고 삶은 다음, 물에 담그어 손으로 비벼서 외피를 제거하는 방법이다. 결국 생냉이는 삼을 삼기 전에 불필요한 외피를 벗겨내고 삼는 반면에, 익냉이는 삼을 삼은 다음에 잿물을 넣고 삶아서 외피를 벗겨내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생냉이로 삼베를 만들면, 삼삼기를 할 때 삼을 무릎에 놓고 비벼야하기 때문에 익냉이보다 품이 훨씬 많이 든다. 그러나 품이 더 많이 드는 기술인 대신 보다 양질의 삼베를 생산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결과적으로 안동 사람들은 생냉이 기술을 이용하여 고운 삼베를 짤 수 있었던 것이다.
안동포를 만들기 위해서는 과정 중 100여 번의 손길이 필요하다. 1년에 한 농가에서 5필~8필정도 생산하며 현재 안동 전체 생산량은 1년에 5000필에서 7000필 정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