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정사의 유래
봉정사는 한국 목조문화의 박물관이며 불교문화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목조문화의 박물관으로는 극락전, 대웅전, 화엄강당과 고금당 등에서 건축사적 맥락을 이해할 수 있으며 불교문화사적 의미로는 화엄사상의 종찰이며 다양한 탱화와 영정, 그리고 묵서 등 안동지역과 불교문화 대표하는 유물이 소장된 사찰이다.
봉정사가 언제 창건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신라 문무왕 때 의상대사의 창건이라는 기록과 의상대사의 10대제자의 한사람인 능인(能仁)선사의 창건이라는 기록이 있으나 대체로 능인선사가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창건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설이다. 창건 연기설화에 의하면 부석사에서 의상대사가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는데 이 봉황이 앉은 곳이 바로 이곳 봉정사이며 그래서 이름을 봉이 정지한 곳이라는 뜻에서 봉정사(鳳停寺)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봉정사가 창건 이후 역사는 아쉽게도 기록이 많지 않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 6.25전쟁을 겪으면서 사찰에 소장된 자료가 모두 불탔다고 한다.
현재 확인된 자료로는 극락전 보수공사는 1363년에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현재 봉정사 대웅전 역시 조선 초기 이전으로 건축연대를 올려 잡는 견해가 있어 고려말기 봉정사는 국가적인 관심이 있었던 사찰임이 분명하다.
이후 1625년 1809년과 1863년에 보수가 있었다. 1882년에 현판을 새롭게 하였으며 1972년에 극락전을 보수하였다.
전설
의상대사 관련전설
부석사에서 의상대사가 법을 설파하기 위하여 사찰을 건립하기로 마음먹고, 종이로 만든 봉황을 날렸다. 봉황은 처음 북후면 봉서사 자리에 앉았다가 다시 날아서 서후면 봉정사에 자리를 잡았다. 이에 여기에 사찰을 짓고 봉이 자리 잡은 곳이라 하여 이름을 봉정사라고 하였다.
능인선사관련전설
봉정사를 창건한 능인선사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천등산 천등굴에서 수행을 하고 있었단. 이때 하늘에서 능인선사를 시험하기 위하여 보살이 여자로 변하여 능인선사를 시험하였다. 능인선사는 보살이 변하여 찾아온 여자를 물리쳤고, 보살은 이러한 능인선사의 도력에 감동하여 어두운 굴을 밝히기 위하여 하늘에서 불을 내려주었고, 이때부터 이 굴을 천등(天燈)굴이라고 하였고, 산 이름을 천등산이라 하였다.
건축
봉정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추정되는 극락전과 한국 목조건축의 미학을 담고 있는 대웅전등이 있다. 시대별로 건축미학을 대표하는 건물이 있기 때문에 한국 건축의 박물관이라 하여도 무리가 없다.
봉정사 일주문
일주문(一柱門)은 사찰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이자, 사찰의 경계이다. 곧 일주문을 지나는 것은 부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일주문은 기둥이 한 줄로 되어있다. 이것은 한마음 (一心)을 뜻하는 것으로, 항상 한마음 한뜻을 가지고 수도하고 교화하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석축
봉정사를 진입하기 전에 먼저 대하는 것은 석축이다. 중앙으로 자연석 계단을 삼단으로 건축하여 만세루로 이어지게 하고 있다. 봉정사 석축은 부석사의 석축과 함께 자연석을 활용하여 튼튼하고 또한 미감이 뛰어나게 설계되었다. 한국 석축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다.
다른 한편 불교적 상징성으로 볼 때 석축의 계단은 구도와 수련의 과정을 설정하고 있다.
만세루
만세루는 세속의 공간에서 본격적인 불교적 공간으로 귀의하는 관문이다. 석축의 중앙으로 난 계단을 오른 수행자는 만세루를 통과하여야만 비로소 불교적 이상향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만세루는 이러한 불교적 조형성을 살리기 위하여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건축되었고, 풍판을 달아 건물의 위엄을 갖추었다.
극락전
한국에서 가장 오랜 건축물이다. 고려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 건축양식은 삼국시대 양식을 따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이며 잘 정돈된 기단과 배흘림 양식의 기둥, 그리고 주심포와 맞배지붕은 간결한 건축미학의 절정을 보게 한다.
1972년 보수공사 후 툇마루를 없애고 창문도 고형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대웅전
대웅전이 언제 건립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조선 초기 건축물로 보고 있지만 최근 자료에 의하면 건립 시기는 이보다 훨씬 앞당겨져 13세기후반까지 소급될 수도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대웅전은 막돌 허튼쌓기 기단부에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이며 다포양식이다. 공포는 내외 2출목이며 외부쪽은 쇠서형이며 내부쪽으로 교두형으로 짜여져있다. 건물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여 다른 지역 대웅전에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대웅전의 기능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후대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기둥에 그려진 용과 특히 닷집 천장에 그려진 용은 중국의 영향을 말해주고 있으며, 수미단과 천정의 문양은 같은 것 같지만 그 하나하나가 다른 문양이어서 대웅전을 더욱 신비하게 만들고 있다. 포작과 창방에 그려진 그림 등은 대웅전이 건축적 의미 이외 회화적 가치도 높은 건축물임을 말해주고 있다. 현재 보물 제 55호로 지정되어 있다.
화엄강당
화엄강당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 주심포계 익공양식을 취하고 맞배지붕의 건축물이다. 자연석을 낮은 기단을 조성한 후, 덤벙주초 위에서 기둥을 놓았다. 기둥을 짧게 하고 공포부재를 높여서 지붕과 비율을 1:1 정도로 조성하여 안정감을 높였다.
주심포계에서 익공계로 변화해가는 초기 절충형식을 보여주고 있어 조선후기 익공계 양식이 어떻게 생성되기 시작하였는지를 보여주는 건물이다. 현재 보물 제 448호로 지정되어 있다.
고금당
고금당은 화엄강당과 같은 시기에 건축되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중기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화엄강당과는 달리 기둥을 높여서 지붕과의 높이를 조절하였다. 기둥은 주심포계열에 속하지만 익공계 양식을 상당부분 차용하여 익공계 양식으로 분류하여도 무방하다. 선원으로 사용된 관계로 아궁이를 내었고 숙식이 가능하도록 하였다.
무량회해
정면 4칸 측면 3칸의 겹쳐 집에 전면과 남쪽에 마루를 두었다. 화엄강당을 마주보고 있으며 대웅전을 중심으로 대칭을 이루는 건물로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쪽으로 승방과 연결되어 있어 봉정사의 생활공간의 축을 이룬다.
안정사 석조 여래좌상
이 불상은 월곡동 미질동 안정사의 봉안된 불상이었다. 연화좌대에 안치된 불상을 안정사 주지가 금분을 칠하여 원형이 다소 훼손되었다. 안동댐 건설로 안정사가 폐사되자 봉정사로 옮겨졌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44호 지정되어있다.
삼성각
산신 칠성 독성을 모신 전각으로 극락전 뒤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르고 내리는 산등성이의 언덕길에 운치가 있다.
기타
삼층석탑
극락전 정면에 위치한 탑으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82호로 지정되어있다. 조형기법으로 보아 고려초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2층 기단부보다 옥신석의 폭이 좁아 체감 비례가 아쉬움을 준다. 총 높이는 318cm이며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만 있다. 극락전이 만들어지면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다.
영산암
영산암은 봉정사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입구에서 영산암과 봉정사로 들어가는 길이 각각 달랐으나 현재는 봉정사를 통해서 갈 수 있도록 조정되었다.
한국 민간조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으며 영화“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동승” 등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우화루와 산신각, 응진전 등의 건물이 있다. 현재 영산암 정문 역할을 하는 우화루는 원래 극락전 앞의 누였으나 1972년 보수공사 당시에 이곳으로 옮겼다. 우화루와 연결된 요사채에는 각종 민화형식의 그림이 남아있어 색다른 느낌을 준다.
한편 일제강점기 즈음하여서는 의병활동의 모임지로도 활용된 곳이다.
지조암
봉정사를 오르다가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나오는 암자가 지조암이다. 법당과 요사체, 칠성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1895년에 중수한 기록이 있으며 조용한 암자로 알려져 있다.
명옥대
봉정사를 오르다가 왼편에 보이는 작은 누정이 명옥대(鳴玉臺)이다. 1665년 사림에서 퇴계선생이 이곳에서 학문을 연마한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
정면 2칸, 측면 2칸, 계자난간으로 둘렀다. 원래는 중간 칸은 숙박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마루로 개방되어 주변을 사색할 수 있도록 하였다. 원래 이름은 창암정사(蒼巖精舍)라고 하였으며 정자 앞에 흐르는 개울 암벽에 명옥대라고 암각서가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자료 174호이다.
종각(鍾閣)
종을 매달아 놓은 곳으로 종루(鍾樓)라 부르기도 하며, 북을 매단 곳을 고루(鼓樓) 또는 고각(鼓樓)이라 하지만 대개 절의 사물(四物)이 함께 안치되어 있어 통칭하여 종각이라 부른다.
소장 문화재
봉정사에는 건축문화재 이외에 문화적 가치가 높은 문화유물들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개개의 문화재 모두가 불교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중요한 것들이다.
봉정사 후불탱화
봉정사 대웅전을 수리하던 도중 탱화로 막아놓은 곳에서 발견된 후불탱화이다. 대웅전이 조성될 당시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고려시대 후불탱화가 많이 남아있지 않은 관계로 보살의 위치, 연화, 당초문양 등 중요한 관련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림 내용은 영산회상도로 추정되며 크기는 가로, 세로 합쳐 417cm 정도이다.
괘불
1710년에 조성된 대형 탱화그림이다. 괘불은 법당에서 법회를 볼 수 없기에 야외에서 법회를 볼 때 불단을 대신하여 설치는 대형그림을 말한다. 현재 봉정사에 전해오는 괘불은 1710년에 그려진 것으로 가로 576cm 세로 731cm 이다. 중앙에 석가모니, 중간에 10대제자, 하단에 8대보살을 배치한 영산회상도이며, 적색과 청록색을 주로 사용하였다. 대웅전 안에 놓여있는 괘불함에 넣어 보관하고 있으며 법회시 대웅전 앞 괘불대를 활용하여 설치한다.
대장경
봉정사 소장 대장경판은 1769년 설월관성(雪月觀性), 월암지한(月岩旨閒) 스님에 의하여 판각되었다. 영산암에 보관되고 있으며 불기 2542년(서기 1998년) 석가탄신일에 인경불사를 하였다.
어필
봉정사에 전해오는 어필은 모두 2점이다. 공민왕의 친필이라 전해오는 진여문(眞如門)이 그것이다. 진여문은 봉정사 대웅전 앞에 있었던 문에 걸렸던 것으로 전해온다. 목판으로 전해지는 어필 위에는 려공왕보묵(麗恭王寶墨)이라고 적혀있다.
다른 하나의 어필은 선조의 친필로 여겨지는 현판글씨이다.
탱화
공민왕의 진영이라는 전설이 담긴 대왕탱화는 모두 5개로 붉은색, 노란색, 청색, 검은색, 흰색으로 채색된 5점이 전해온다.
조선후기인 1765년에 그려진 감로탱화도 빼놓을 수 없는 보물급 문화재이다. 감로탱화는 민중들의 일상을 탱화에 담은 파격적이 돋보이는 불화이다. 가로 240■230cm 크기이다.
대웅전 후불탱화는 1713년에 그려진 것으로 역시 문화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불상
지조암에 모셔져있는 관세음보살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재질은 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