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동 석불상은 일반적으로 제비원으로 불려지고 있다. 형태는 바위에 커다란 몸체를 새기고 두상은 별도로 조각하여 얹은 마애불이다. 인근에는 연미사가 있고, 지역에서는 제비원으로 불려지고 있다.
불교적 문화재가 분명하지만 제비원이 집을 창조한 신격으로 한국 전역에 알려져 있어 한국 문화전반에 미친 그 문화적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안동의 향토지라고 할 수 있는 영가지(永嘉誌)에 보면 석불과 전각이 634년(선덕여왕 3년)에 조성되었으며 여섯 칸의 누각으로 위를 덮었고, 집모양이 하늘에 날개를 펴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이 기록에는 이후 두 차례 중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지역민들의 계속된 관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연미사를 누가 창건하였고, 불상을 누가 조성하였는지 정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연미사라는 이름에서 이 사찰을 조성한 사람이 보덕법사의 제자 중 명덕화상이라는 주장이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명덕화상은 연구사(燕口寺)라는 사찰을 세웠다. 연미사에 전해오는 전설에 의하며 현재 불상과 그 전면에 있는 바위까지 전각을 세워 덮었고 이 모양이 제비모양을 띄고 있는 석굴사원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비모양 중 석불이 있었던 위치가 제비의 부리 즉 연구(燕口)이고 현재 연미사(燕尾寺)는 원래 이름이 스님이 기거하는 연미사(燕尾舍)이며 이러한 이름은 제비의 꼬리부분에 해당되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현재 조성된 이천동 석불의 조각 양식과 결합되어 새롭게 연구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천동 석불상과 연미사가 위치하고 있는 곳은 서울에서 안동으로 진입하는 입구이다.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주막과 숙박시설이 늘어져있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객손들과 나그네들이 묵고 가는 곳이라는 점이다.
이곳에 제비원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러한 숙박시설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된다. 조선 초기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찰을 국가에서 원(院)으로 지정하여 국가적인 공무를 띈 사람들의 숙소로 사용하였으며 이때 연미사는 기존의 전설과 건축의 이름인 제비, 연(燕)이라는 이름에 원이라는 숙박의 기능이 부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연미사에 석불상 이외 다른 불교 유적지는 없었다고 한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긴 봉정사의 재가신도 모임인 등촉계중 거사림에서 연미사를 새롭게 창건하기를 발의하여 1934년에 연미사를 새롭게 조성한다.
1947년 칠성각을 다시 지었으나 70년대 초 무허가 건물로 철거당하고, 1962년 요사체 한동이 조성되었다. 1978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증축하였고 1986년 단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국 전역에서 불리워지는 “성주풀이”는 집을 창조한 신에 대한 내용, 즉 집의 신화를 구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를 준다.
이 신화적 내용, 즉 성주풀이에 따르면 한국의 집은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에서 솔씨가 이 마을로 날아왔고, 이 솔씨가 큰 나무로 자라났다. 이 나무로 우리 집을 지었으니 우리 집이 얼마나 평안하고 잘 되겠는가! 라고 역설한다.
집을 창조한 신인 성주신은 집을 조성하면서 상량식과 함께 집안에 모시거나, 혹은 집은 완성한 후 무당과 집의 주인어른이 함께 의례를 행하면서 신격을 모시기도 한다. 성주신격을 드러내는 “신체”는 종이로 사각을 접어서 깨끗한 나무와 실을 함께 엮어서 만든다.
성주신은 마치 집안의 대주와 함께 인식된다. 즉 집안의 최고어른이 죽으면 새롭게 성주신을 모시고, 성주의 생일이 되면 성주생일이라고 의례를 거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성주에 대한 인식은 “성주는 대주를 믿고 대주는 성주를 믿고”라는 성주풀이의 신화구술에서 드러난다.
전통사회 집은 모든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다. 이렇게 집을 창조한 신의 본향, 고향이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라는 점은 한국문화에 제비원, 곧 이천동 석불상이 자리하는 의미를 되새김할 수 있다.
전설
연이처녀 전설
옛날 제비원에는 연이라는 예쁜 처녀가 살았다. 모든 사람들이 연이처녀의 덕행과 아름다운 마음씨에 반하여 좋아하였다.
이웃마을에 김씨라는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김씨 총각이 죽어서 저승을 가게 되었다. 그런데 염라대왕이 하는 말이 “자네는 아직 올 시기가 아닌데, 저승사자의 실수로 저승에 오게 되었으니 다시 이승으로 가라”고 하여 이승에 내려오게 되었다. 미안한 저승사자가 이 기회에 저승세계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하여 이곳, 저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저승창고를 가니 자신의 이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창고를 보게 되었다. 저승사자는 이곳은 이승에서 덕행을 쌓으면 곡간에 금은보화가 쌓이고 이승에서 악행을 쌓으면 돌이 쌓이게 되어 다시 세상에 태어날 때 소 등의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신의 창고를 보니 돌이 가득 쌓여있었고, 이웃에 연이처녀의 창고를 보니 금은보화가 가득 쌓여 있었다. 이것을 본 저승사자는 갈 길이 멀고 노잣돈이 없으니 연이처녀의 금은보화를 빌려서 이승까지 가야한다고 하면서 이승에 돌아가서 연이처녀에게 이 빛을 갚으라고 하였다. 연이처녀의 금은보화를 빌어서 다시 이승에 태어난 김씨 총각은 연이처녀에게 이 사연을 말하고 자신이 가진 재물을 나누어주었다.
연이처녀는 그 재물로 절을 지었는데 이 절이 바로 연미사이다.
이여송 전설
임진왜란을 당하여 온 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조정에서는 중국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명나라에서는 장수 이여송과 군사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런데 이렇게 조선에 온 이여송은 조선에서 인물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산천의 혈(穴)자리를 끊고 다녔다고 한다.
마침 안동에 온 이여송은 제비원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게 되었는데, 갑자기 말이 움직이질 못하고 멈춰서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이여송이 이상히 여겨 사방을 둘러보니 제비원 미륵불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미륵불 때문에 말이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판단한 이여송은 큰 칼을 들고 제비원 미륵불위로 올라가 목을 쳐서 떨어뜨렸다. 그러나 베인 목에서 피가 흘러나왔고, 말이 비로소 움직일 수 있다.
그때 흘러내린 핏자국이 아직도 제비원 미륵불의 목과 가슴에 남아있다.
건축
이천동 석불상과 이천동 삼층석탑은 불교적 가치를 건축물로 표현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미륵경에서 말하는 중생구조의 설화적 구조를 이천동 석불상은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탑의 배치 역시 다른 사찰과는 달리 석불상의 오른쪽에 배치한 것은 미륵경전에 근거한 것이어서 다른 지역의 불교적 세계관과는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천동석불상은 미륵경전에 의거한 세계관을 적확하게 반영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천동석불상
흔히 제비원은 이천동 석불상을 지칭한다. 석불상 제비원, 연미사의 이미지를 대표하기 때문이다. 제비원의 정식명칭은 이천동 석불상이며 현재 보물 제 11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천동 석불상은 마애불로서 불상형식으로 볼 때는 고려시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높이는 12.38m 몸체가 새겨진 바위는 9.95m 너비 7.2m이다. 바위에는 그림을 새기고 두상은 입체로 조각하여 얹은 특이한 형태의 불상이다.
두상의 전면은 완전한 형태를 띄고 있지만 후면은 자연석을 그대로 두었다. 두상과 바위의 선이 연결되는 부분은 삼도가 뚜렷하게 보이며 법의는 통견으로 내려와있다. 아래로 내려올 수로 바위선이 흐려져 바닥과 가까운 곳에 새겨진 연화대는 거의 보기 어려울정도로 마모되어 있다. 수인상은 오른손은 배에 붙이고 왼손은 장지와 엄지를 맞댄 중품하생인(中品下生印)상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불상을 아미타불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대체적인 흐름상 미륵불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두상 양옆으로 기둥을 세운 흔적이 있어 닷집 형식의 건축물이 석불상 전체를 덮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일제강점기에는 닷집이 있었고, 그 이후 어느 시기에 닷집이 파손되었다고 전해진다.
참배 공간
이천동 석불상의 3m 전방에는 바위가 막고 있고, 석불상 오른쪽에도 바위고 막혀있다. 이렇게 볼 때 연미사 한쪽 방향만으로 진입이 허락된다.
이 같은 배치는 이천동 석불상에 대한 참배의식이 독립성을 보장해주고 가까운 곳에서 불상을 올려다는 신이함을 주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종교공간의 상징성을 높이는 장치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곳에 석불상을 조성한 것은 자연공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불교적 수행을 높이기 위함으로 보인다.
이천동 삼층석탑
이천동 석불상 우측 오도산 자락에 위치한 화강암의 삼층석탑이다. 양식상 고려 초기 혹은 신라말기의 탑으로 추정되며 지방유형문화재 제 99호이다.
연미사 중창 시에 오도산자락에 흩어져있던 부재를 모아서 조성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때문인지 단성기단과 옥신부의 비례가 어색하다. 이 때문에 타 석탑의 부재가 혼재되어 있을 것이라는 추정도 하지만 2층 이상의 탑결구가 완전하여 구도상 하나의 탑일 가능성이 높다.
상륜부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오도산
이천동 석불상과 연미사가 자리한 곳을 오도산이라한다. 오도(五圖)란 불상, 연좌루, 삼층석탑, 연미사, 소나무를 말한다. 오도산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고 그 기슭에 연미사가 자리하고 있다.
법당
연미사의 법당은 1978년에 증축되어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우측 한 칸은 승방으로 사용하고 있어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를 모시고 있으며 신중, 칠성, 산신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신중탱화는 1880년에 그려진 것이어서 연미사 조성과 관련된 수수께끼를 던져주고 있다.
중수비
불상 정면에 있는 바위 위에는 1918년에 세운 연미사 중수비가 있다. 이 비의 높이는 125cm, 너비는 42cm이다.